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이크 타이프 Apr 16. 2020

<좋은 생각>에 대한 나쁜 생각

냉수마찰이 하고 싶다

 우편함에 노란 각대 봉투가 담겨 있었다. 책인 것 같다. 뭘까. 정기 구독하는 잡지는 며칠 전 월요일에 받았고...책을 온라인으로 주문한 적도 없는데. 수신인 이름을 보니 나한테 온 게 맞긴 하다. 뜯어보니 기억이 난다. 한두 달 전이었나. <좋은 생각>이라는 월간 잡지가 주최한 '제15회 생활문예대상 응모전'에 글을 보낸 적이 있다. 응모한 글이 채택되진 않았지만, 소정의 선물로 잡지사에서 <좋은 생각> 5월호 한 권, 부록으로 벚꽃 그려진 블링블링한 노트 한 권을 보내준 것이다. 아쉽고 고맙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밝고 따뜻한 이야기’를 지향하는 잡지답게 따뜻하고 잔잔한 감동을 주는 소박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잡지를 찬찬히 읽어본다. 응모작들을 심사한 정여울 작가의 심사평도 담겨 있다: “누군가의 삶이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내 삶에 노크하는 느낌. 그것이야말로 좋은 글을 읽었을 때의 눈부신 감동일 것이다.”    

  

 그런데 문득, 짓궂은 생각이 스친다. 이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책 한 권을 조용히 읽고 있으려니, 뭐랄까. 잔잔한 감동 스토리, 정겨운 이야기들이 좋기는 한데. 뭐랄까, 음...이를테면 이런 장면들이 오버랩된다.   


 여기는 어느 작은 도시의 변두리. 쌀쌀한 바람이 부는 늦저녁이다. 친구를 만나기로 한 카페가 보인다. 가게를 장식한 오렌지빛 백열등의 온기가 느껴진다. 어서 오세요. 선하게 생긴 카페 주인이 십자수를 뜨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이한다. 프렌치 스타일의 패브릭 모자를 쓰고 있다. 몸 좀 녹이라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 한잔과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넨다. 밖이 좀 춥죠?


 따끈한 카페라테와 달콤한 치즈케이크를 주문하고 카페 구석, 빈 테이블로 향한다. 푹신하고 두루뭉술한 솜 방석을 얹어 놓은 의자 위에는 핑크빛 감도는 극세사 무릎 담요도 놓여 있다. 담요까지 깔고 앉기는 좀 그렇고 해서 무릎에 담요를 덮는다. 카페 천장, 빌트인 히터의 부드러운 바람이 공간을 감싼다. 느린 템포의 피아노 선율이 나지막하게 따스한 공기 속에 녹아든다. 캐논 파헬벨로 유명했던 조지 윈스턴의 곡이었나? 데이비드 랜즈? 유키 구라모토의 곡이던가? 오랜만에 뉴에이지 음악을 들으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옆 테이블에서는 반듯하게 다린 셔츠를 맨 윗 단추까지 꼼꼼하게 채운, 조금은 창백한 얼굴의 두 청년이 다소곳하게 앉아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가지런히 깍지 낀, 가늘고 긴 새하얀 손가락. 비폭력을 상징하는 평화의 손이다. 인상 좋은 카페 주인은 주문한 메뉴를 정성스레 마련해 손수 가져다주신다. 토끼 모양이 앙증맞게 그려진 초콜릿 쿠키는 서비스. 뭘 뜨고 계셨냐는 나의 질문에 우리 딸 주려고 테이블 러그를 뜨고 있었어요라고 말하는 마음씨 좋은 카페 주인.


 호~ 머그컵에 든 따끈한 카페라테 한 모금. 동그란 안경에 김이 서린다. 나를 채운 온기를 만끽하고 있을 즈음, 약속 시간에 조금 늦게 온 친구가 오는 길에 네 생각나서 하나 샀다며 머플러 하나를 쇼핑백에서 꺼내 내 목에 두른다. 내 안색이 좀 피곤해 보인다며, 무슨 일 있냐며, 힘내라며 미소를 건네는 착한 내 친구. 아니야, 괜찮아, 고마워, 너밖에 없다. 세상은 아직 살만한 것 같아. 세상은 그래도 아름다워...   

   

 따끈한 카페라테 때문일까. 백열등의 온기 때문이었을까. 천장에서 퍼지는 온풍 때문일까. 반듯한 청년들이 나누는 성스러운 아버지의 말씀 때문이었을까. 뜨개질하는 주인의 정감 어린 모습? 뉴에이지 명상 음악? 푹신한 방석? 무릎 담요? 친구가 선물한 머플러? 따뜻한 응원의 메시지? 아니면, 토끼 모양 쿠키 때문일까? 갑자기 좀...피곤해지네. 추운 겨울, 단열이 잘 되는 방에서 창문을 꼭 닫은 채 히터를 틀고 폭신한 솜이불을 덮고 누우면 어느새 느껴지는, 그런 나른한 피로감이랄까.      


 문득! 시원한 아이스커피가 마시고 싶다. 얼음 잔뜩 넣은 콜라(다이어트 콜라 말고)가 당긴다. 얼음은 오도독 씹어 먹어야지. 독한 데낄라 한잔에 신맛 톡 쏘는 레몬 한 조각. 침이 고인다. 매캐한 말보로 레드 담배 한 모금. 힘들어? 배가 불러서 그래, 요즘 것들은 아무튼, 하며 혀를 끌끌 차는 엄한 표정의 아버지가 떠오른다. 냉수마찰을 하고 싶다.


 마키아벨리의 말 - “모든 인간은 사악하다” - 은 왜 떠오르는 것인지. 믿을 건 오직 나!라고 외치는 온라인 게임 광고. 할리 데이비슨의 요란한 시동음. 지금은 연락이 끊겨 버린 옛 친구 한 놈은 오토바이족이었다. 당시 히트작 영화 <비트>의 주인공을 따라 한답시고 쇼바를 잔뜩 올린 VF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어느 날 과속으로 도로 한복판을 질주하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3개월 입원. 오른쪽 정강이에 철심을 박았다며 건들거리던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거친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흙이 잔뜩 묻은 픽업트럭의 큼지막한 타이어. MLB 챔피온십에서 벌어진 벤치 클리어링. 흥분해 침 튀기며 중계하는 덩치 큰 백인 아나운서의 얼굴. 실버스타 스탤론이 주연한 오래된 영화 <탈옥>을 기억하는가. 죄수들이 진흙탕을 뒹굴며, 온갖 반칙을 섞어 럭비인지 패싸움인지 모를 내기 게임을 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고 생각한)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을 앞두고 있을 때였나. 학교 건물이 낡아 히터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교실,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하소연했다. 선생님, 추워요! 그래? 그럼 뛰어야지. 빨리 안 나가?! 그날 우리는 꽁꽁 언 땅에서 2시간 동안 축구를 했다. 친구 한 놈은 삼선 쓰레빠(슬리퍼 아님)를 신고 공을 차다 새끼발가락이 부러졌다. 꼭 그렇게 허세 넘치는 놈들이 있었다. 류승완 감독의 시원한 액션 영화, <짝패>는 또 어떤가. 친구를 배신하는 악역을 야무지게 연기한 배우 이범수는 이런 명대사를 남겼지 아마. “강한 놈이 오래 가는 게 아니라, 오~래 가는 놈이 강한 놈이더라.” 영화에서 그는 결국 친구의 칼침을 맞고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둔다. 매력적인 빌런의 죽음은 언제나 짠하면서도 통쾌하다.


 왜... <좋은 생각>만 있고, <나쁜 생각>은 없는 거지? 좀 독한 생각, 비열한 생각, 독설, 욕설은 안 되는 건가? 샘통이다, 잘 죽었다, 용서 못해, 개나 줘라, 즐~, 너나 잘해라, 인생은 혼자다, 돈이 최고다! 뭐, 이런 류의 불순한, 그래도 한편으로 그럴 만하네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졸렬하고 치졸한 모든 종류의 비뚤어진 생각들. 그런 나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통렬한 사연들. 이런 것들을 엮어 월간 <나쁜 생각>을 발간해보는 건 어떨까. <좋은 생각>이 “아름다운 사람들의 밝고 따뜻한 이야기”를 지향한다고 하니, <나쁜 생각>의 슬로건은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면에 숨겨진 어둡고 사악한 이야기” 정도가 되겠군.


 <나쁜 생각> 생활문예대상 공모전도 열어 보자. 물론 너무 잔인하고 섬뜩하고 비인간적인 사연은 제외다. 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의 세계를 그려보자는 얘기는 아니다. 블라디미르 V. 마야코프스키처럼 너무 급진적일 필요도 없다(그는 "혁명의 탄환은 피를 동경한다"는 말을 남겼다). 너무 나쁜 생각은 재미 없고 비현실적이다. 너무 좋은 생각도 때로는 밋밋하고 재미없는 것처럼. 세련되게 감정을 타격하는, 그런 나쁜 생각을 멋들어지게 쓴 글에 대상을 주자. 참고로 <좋은 생각> 응모전 대상 수상자에게는 200만 원의 상금을 준다. (그래서 나도 응모를 했다) <나쁜 생각> 대상 수상자에게는 2000만 원을 줘 볼까. 왜? 말했잖아, 돈이 최고라고!     


 우수 콘텐츠잡지로 선정된, 따뜻하고 건전하고 선량한 잡지를 비난하거나 비꼬는 건 아니니 오해 마시길. 각박한 삶 속 따뜻한 감동을 건네는 책이 나쁠 리 있나. 다만, 그냥 갑자기 좀... 그렇다는 얘기다. 무알콜 맥주를 마시며 공부 잘하는 모범생들만 나오는 드라마 한 편을 본 것 같다고나 할까.      


이놈의 모난 성격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러고 보니 난 셔츠 맨 윗 단추를 채워본 적이 없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