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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Jun 18. 2019

일기 쓰기가 어려운 이유

일기는 서사에 가깝다


* 일기(diary):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


글쓰기를 별로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니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일기 쓰기는 쉽지 않다.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매일같이 쓴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일기를 써야겠다는 욕심은 있지만 잘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세줄 일기>라는 스마트폰 앱이 나와 인기를 얻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세줄이라도 쓰는 게 아예 안 쓰는 것보다야 훨씬 낫겠지만 나의 긴 하루를 달랑 세줄로 마무리한다는 게 왠지 헛헛하다.


우리는 보통 소중한 나날을 일상으로 퉁친다

일기 쓰기가 어려운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두 가지 정도가 떠오른다. 첫째 우리는 각자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을 모조리 '일상'이란 한마디로 퉁쳐 버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일상을 조금 더 상세하게 분해해 보면 어제를 완벽히 복사한 오늘은 단 하루도 없다.


내가 오늘 하루 한 일이 직장에 나가고,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가끔은 야근을 하거나 친구를 만나고 집에 돌아간 일만 있겠는가. 오늘의 하늘에는 어제와 다른 구름이 떠 있고, 오늘의 바람은 어제의 바람보다 더 따뜻하거나 차갑다. 내가 읽은 책이 있을 것이고 그 책의 글귀 중 밑줄을 그어 놓은 것도 있다. 길을 지나다 다이소에 들러 충동구매한 천 원짜리 물건이 있을지도 모른다. 뜻하지 않게 기념품이나 선물을 받을 때도 있다. 내가 오늘 얼마의 돈을 썼는지, 왜 썼는지를 고민해 보는 일기는 자산관리에 도움이 된다. 점심 메뉴를 한참 고민하다 들른 식당의 이름을 적어보는 것은 어떨까. 매일같이 타는 버스 정류장, 정차하는 버스들의 번호를 생각나는 대로 적어볼 수 있다. 직장에서 집까지의 지하철 노선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아도 일기장 몇 줄은 채울 수 있다. 내가 매일 같이 머문 공간들에 대한 내 기억들의 양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저녁 혼밥 대신 친구를 만났다면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자. 내가 얼마나 그 친구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는지를 알게 되니 미안함이 앞선다.


일기, 즉 하루에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쓰기 위해서는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시간과 공간, 사건을 오감으로 느끼는 정성이 필요하다. 내가 있었던 공간, 그리고 함께 했던 사람들, 그들과 나누었던 대화. 이런 것들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순간순간의 소중한 사건들을 '일상'이란 박스에 모조리 쏟아 버리는 불상사가 생긴다. 그렇다고 매일같이 새로운 경험을 '발명'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또 다른 일상을 힘겹게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색다른 일상의 순간들을 소소하게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기에 너무 많은 감정을 쏟아 넣는다

일기 쓰기가 어려운 두 번째 이유는 일기장에 '느낌 따위', 감정을 채워 넣는데 너무 공을 들인다는 점이다. 하루에 대한 반성이라는 무거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부담감 때문일까. 아니면 자아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더불어 타아에 대한 지나친 무관심 때문일지 모른다. 이를 어려운 말로 나르시시즘, 쉬운 말로 자뻑이라 말한다.


지나고 보면 별 것 없는 순간의 감정을 곱씹고 분해하고 과대 포장한다. 이런 감정풀이를 되풀이하다 보면 일기장은 어느덧 후회, 슬픔, 그리움, 분노, 우울함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다. 특히 일기는 보통 밤에 쓴다. 다음날 아침에 쓰지는 않는다. 밤이라는 시간은 교묘하게 사사로운 감정을 증폭시키는 힘이 있다. 감정은 감성(sensitivity)이 되고 감성은 불필요한 세심함(이것도 sensitivity)을 낳는다. 며칠 전, 또는 몇 년 전 썼던 일기장을 다시 펴면 손가락이 오그라들며 괜한 창피함이 몰려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감성은 좀처럼 진보하지 않는다. 물론 때때로 묘한 기분좋음을 발산하기도 하지만 감성은 좀처럼 진보하지 않는다. 회기할 뿐이다.


일기를 쓸 때는 감정이 아닌 사건과 행동을 보다 자세하게 회상하고 기록하는 것이 더 낫다. 사건과 행동에 대한 의견과 평가를 덧붙이면 일기가 풍부해진다. 그런데 여기에 감정이란 MSG를 너무 많이 치면 텁텁하고 느끼하다.


언젠가는 다시 펼쳐볼 일기장에 적힌 크고 작은 사건, 물건과 사람, 대화와 의견은 거대하고 생생한 나의 역사를 구성한다. 생생한 역사책은 언제 읽어도 재밌다. 역사책에 등장하는 사건들과 인물들을 접하다 보면 새로운 정보와 인식, 감정이 생긴다. 감정 - 이를테면 우울함 - 으로 가득 찬 지난날의 일기를 다시 읽다 보면 우울함이 재발하거나 또 다른 후회(내가 왜 이런 것만 일기에 썼을까?)만이 생긴다. 사건과 맥락을 거세한 감정사(史)를 통해 얻는 교훈은 별로 없다. 세종실록에 세종대왕이 매일 느꼈던 감정만이 수두룩하게 실려 있다면 후세들이 무슨 정보와 교훈을 얻겠는가.


일기는 서사에 가깝다

우리 모두의 일기장은 언젠가는 - 가급적이면 죽은 후에 - 모든 이에게 공개될지 모른다. 누가 보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누군가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의 공존. 이 묘한 긴장감이 일기장의 백미다. 사건과 행동, 의견이 아닌 감정으로 가득 찬 일기는 이 긴장감을 축소한다. 이런 일기는 좀 창피하다. 누가 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현실이 된다. 누군가 야릇한 기대감에 내 일기장을 펼쳐보지만 별 것 없는 감정풀이에 지루함만 남는다. 일기장의 백미가 여지없이 사라진다.  


그.래.서. 일기는 서사(narrative)에 가까운 글이 되는 것이 오히려 맞다.


* 서사: 어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글의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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