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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이크 타이프 Apr 17. 2020

단수

What a day, what a lovely day

내가 사는 곳 관리사무소에서 이런 문자 공지 메시지를 보내왔다.  


동별 메인 급수라인 밸브 및 감압밸브 교체 공사로 온수 및 냉수 공급이 중단됩니다. 

급수가 중단됨에 따라 사용하실 물을 미리 받아 놓으시기 바랍니다. 

단수 일시: 2020년 2월 13일 목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난감했다. 오늘은 2월 13일 목요일이고, 단수 안내 공지를 제대로 읽어봤을 때는 오전 10가 넘어서였다. (다시 보니 문자 메시지가 온 날은 2월 7일이었다.)  어제 - 오늘인가? - 새벽 4시 넘어서까지 강의안을 만들다 늦게 잠든 것이 화근이었다. 오늘은 강의가 없으니 집에서 편하게 커피나 한 잔 하면서 못 다 마친 강의안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화장실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어보니 여섯 살짜리 아이 오줌처럼 쨀쨀쨀 나오는 물. 이미 물 공급은 중단되었고 수도꼭지는 파이프 속에 남아 있던 약간의 물을 게워내고 있었다. 부리나케 냉면 그릇 - 하필이면 냉면 그릇 - 을 수도꼭지에 댔다. 잘하면 세수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싶었다. 혹시나 해서 주방 수도꼭지를 틀어보니 역시 졸졸졸. 얼른 2리터짜리 빈 생수병을 갖다 댔다. 잘하면 밥 안칠 물은 되겠지. 놀랍고 다행스럽게도 수도꼭지는 딱 2리터의 물을 토해내고 숨을 거둔다.  


잠시 고민을 해보기로 했다. 오후 6시까지 물은 안 나올 것이고, 나에겐 2리터의 물과 냉면 그릇 반 정도 찬 물, 그리고 양변기에 들어있는 딱 한 번 내릴 수 있는 물이 전부였다. 물론 단수되었으니 다시 채워지진 않을 것이다.  왠지 생존게임이 시작된 것 같아 묘한, 긴장 섞인 흥미가 생겼다.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그냥 밖으로 나가면 된다. 카페에 가서 작업을 하다가 식당 가서 점심밥을 먹고, 다시 카페에 있다 보면 저녁 6시가 된다. 카페엔 화장실도 있다. 아침에 샤워를 못해 머리가 눌린 채로 나가야 했지만 다행히 야구모자가 있다. 그런데 약간의 애로사항이 있었다. 강의안을 마무리하려면 서재 책상에 잔뜩 늘어놓은 책들을 모두 들고나가야 한다. 24인치 멀티 모니터의 편리함도 포기해야 한다. 노트북과 두꺼운 책들을 모두 가방에 쑤셔 넣고 나가자니 이게 또 은근히 귀찮다. 카페에 있는 2인용 원탁은 노트북 하나, 컵 하나로도 꽉 찬다. 카페에 혼자 와서 테이블 두 개를 차지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두 번째 대안은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소설책 한 권 들고 카페에 가서 오늘 하루 망중한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오랜만에 찜질방에 가보는 건 어떨까. 하지만 이것도 좀 마음에 걸린다. 저녁 6시 이후에 집에 돌아와 강의안을 마무리하자니 또 늦은 새벽까지 컴퓨터를 붙잡고 있어야 할 것 같다. 뭔가 마무리해야 할 일을 끝내지 못하고 즐기는 휴식이 즐거울 리 없다.  


마지막 대안은 그냥 집에서 버티며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최대한 물을 쓰지 않고 견뎌 보기. 약간의 불편함은 있겠지만 절수의 필요성을 체험하는 기회로 삼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마지막 대안을 선택했다.  우리나라도 물 부족 국가라는데 이번 기회에 물 절약을 실천해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겠다. 


물론 이런 약간의 고생조차 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마트 가서 2리터짜리 생수를 10개 정도 사고, 이런저런 먹을거리를 사서 3만 원 정도의 구매액을 넘기면 배달도 해준다. 끼니는 배달음식으로 해결해도 된다. 그런데 이런 해결책은 뭔가 재미가 없다.  유튜브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제작한 베어 그릴스(Bear Grylls)라는 생존 전문가의 모험 동영상이 인기다.  칼 한 자루 쥐고 정글, 북극, 사막을 누빈다. 또 다른 생존 끝판왕 에드 스테포드(Ed Stafford)는 알몸으로 야생에서 생존 게임을 시작한다. 부싯돌로 불을 피우고, 갈대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이 두 사람의 유튜브 동영상은 보통 조회수 100만 회가 넘는다. 생존 게임의 묘미는 이렇게 '부족함'을 해결해 나가는 모험에 있다.   


우선 냉면 그릇의 물을 세면대에 따랐다. 세수를 하되 비누칠은 생략하자. 비누칠을 너무 자주 하면 얼굴이 건조해진다고 하니 오히려 잘 됐다. 손에만 비누를 묻혔다. 한 움큼의 물이었지만 손은 깨끗하게 닦을 수 있다. 소변을 보았다. 익숙하진 않지만 앉아서 오줌을 누었다. 선 자세 소변의 실수로 바닥이 더럽혀지기라도 하면 좀 난감하다. 하마터면 무의식적으로 플러쉬 버튼을 내릴 뻔했다. 한두 번 정도의 소변은 더 담자. 양변기 뚜껑을 덮어놓으면 된다. 나홀로 집이니 괜찮다. 큰 볼일이 아니니 괜찮다. 나에게 남은 플러쉬 총알은 단 한 발이니까. 리로드(reload)는 없다. 결정적일 때 써야 한다.  더구나 나는 변비가 없다.  


2리터의 물을 조금 따라내어 쌀을 씻었다. 한두 번 정도만 야무지게 씻고 밥을 짓자. 0.5리터의 물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쌀 좀 씻는데도 물이 꽤 드는구나. 아차, 쌀 씻은 물을 생각 없이 버렸다. 밥 지을 정도의 물은 남겼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쌀 씻은 물은 세제 효과도 있다던데.   


좀 더 체계적인 생존 전략을 짜 보자. 네이버 검색창에 '물 절약 팁'이라 썼다. 많은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정리해보면 대충 이렇다.      


샤워 시간 줄이기

양치컵 사용하기

변기 뒤편 수조에 벽돌 넣어 놓기

설거지물 받아놓고 쓰기

쌀 씻은 물 활용하기


네이버 검색을 먼저 했더라면 다섯 번째 팁을 놓치지 않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1리터 정도의 물을 주전자에 따랐다. 오늘 마실 보리차를 끓일 물이다. 생존하려면 마실 물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럼 이제 나에겐 0.5리터 정도의 물이 남은 건가. 괜한 긴장감이 돈다. 간단하게 이른 점심식사를 마치고 뜨거운 보리차 한 잔을 따라 서재로 향했다.  


2시간 정도 컴퓨터 작업을 하다 보니 집중력이 떨어진다. 개운하게 샤워라도 할까. 아차, 물이 없다. 싱크대에 쌓인 그릇 설거지라도 할까. 아차, 물. 그냥 하던 일이나 계속하자.  


2시간 정도가 더 지났다. 목이 뻐근하고 졸음이 쏟아진다. 양치라도 해야겠다. 0.5리터의 물이 남아 있다. 양치 컵에 물을 따랐다. 입을 헹궜지만 개운치 않았다. 컵에 물을 반만 더 채웠다. 이제 0.3리터 정도의 물이 남았구나. 이 물로 세수나 한 번 더할까. 세면대에 물을 따랐다. 좀 모자란 듯싶었다. 양변기 몸통에 저장된 물을 조금 퍼서 보탤까. 좀 찝찝했다. 마침 분무기에 담긴 물이 생각났다. 분무기 물을 보태니 그럭저럭 얼굴 씻을 물이 마련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비누칠은 하지 않았다. 세수한 물은 그리 더럽지 않았다. 손 한 번은 더 씻을 수 있겠다. 세면대 마개를 그대로 두었다.  


다시 책상으로 향했다. 조금만 더 하면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배가 고팠다.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까. 아, 물이 없다니까. 그냥 좀 참자. 그냥 일이나 좀 더 하자.  노트북이 과열된 탓인지 냉각 팬에서 약간의 소음이 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노트북이 꺼져 이제껏 만든 ppt가 날아가는 건 아닐까. 성급히 저장 버튼을 눌렀다.  


일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역시 집중하면 효율성이 높아진다. 기지개를 한번 켜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소변을 한번 더. 역시나 물은 내리지 않았다. 세면대에 남아있던 물로 손을 씻었다.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을 때마다 찰박찰박, 물소리가 왠지 쫄깃하다.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화장실을 나오는데 위층 집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니 저녁 6시 15분. 혹시? 수도꼭지를 틀었다. 쿨럭쿨럭, 젖은 기침을 하던 수도꼭지가 물을 토해낸다. 아쿠아(aqua)!


문득 할리우드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떠올랐다. 멸망한 세계, 유일하게 물과 식량이 존재하는 바위산 도시 시타델. 물과 식량을 지배한 독재자 임모탈 조. 그는 물 공급을 통제해 시민들을 지배한다. 그런 도시에서 사는 건 정말 끔찍하다. 독재자 임모탈 조라 해도 행색이 영 말이 아니다. 물부족으로 매일 샤워는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시타델 워터만큼은 에비앙(프랑스산 고급 생수) 뺨을 치지 않을까.


단수는 하루 만에 끝났다. 하루에 다 해내지 못할 것 같은 일도 반나절 만에 끝냈다. 부족했지만 만족스럽다. 때때로 만족은 부족에서 온다. 다시,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극 중 인물인 워보이(War Boy) 녹스가 메마른 사막 한 복판에서 이런 대사를 남긴다. 


What a day, what a lovely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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