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빛 감정선> - 21
젊은 피가 흐르는 올리브색 왕복선을 뒤로 하고
심장의 형상을 본뜬 루비 목걸이를 한 여자가
<원미동 사람들>의 대사를 곱씹으며
남부순환로의 열기에 살포시 몸을 담글 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열차 도착을 알리는 신호음보다도 짧았다.
폴 인 드랍을 외치던 30년 전의 부드러운 그 선율처럼
매끄러운 아스팔트와 그보다 더욱 매끄러운
고무 타이어 네 개가
차디 찬 겨울바람을 밟고 지나갔다.
비로소, 추워야 보이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생, 그 어느 순간부터 아름다운 곡선을 몸에 품은
그대는 그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사명을 이해했을까
그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사랑해준 그이를 기억했을까
순간의 감정은 하룻밤짜리 사랑처럼
흘려보내야 하겠지만
미처 배웅을 나가지 못한 두 사람의 순간이
부딪히고 말았다.
가리봉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대와 그이는 거기서 처음으로, 사랑을 했다.
그대가 읽고 있던 이야기는 <원미동 사람들>
그이가 읽고 있던 모험담은 <0시를 향하여>
아련한 노래가 흘러나오던 어느 카페에서
크리미한 말차 프라푸치노와 함께하던 그 처음을
둘은 가득 서로를 바라보며
그 순간을 한가득 마음에 담았다.
21세기, 옛 풍경을 간직하듯 여전히 비좁은, 그러나 이제는 깨끗하게 치워진 부천의 골목길에서 평생을 살아온 그들은, 그야말로 가리봉동으로 간 현시대의 부천 사람들이었다.
독산과 철산을 넘어다니던 서울의 산업단지 사람들
원미산과 춘의산을 넘어다니던 까치울의 산사람들
가짜같은 사랑과 진짜같은 산을 넘고 넘으며 이루어낸
이 시대의 산 증인들이었다.
이름 변한 도당산의 선산무덤 위에서 태어난 사랑이었다.
둘만의 플레이리스트, 그 사랑의 도입부는 언제나 새로운 욕망과 탐닉이었다.
그것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을지는 아직 시기상조였다.
허나, 가리봉으로 향하는 길엔
아주 시기적절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윽고, 키쿠치 모모코의 <Boy Friend>는
<Southern Cross Dreaming>을 품고
황금 카펫이 깔린 남부순환로를 질주했다.
갈라진 봉우리라며 가리봉이라 이름붙인 먼 옛사람들
그들의 비호를 두 몸에 나누어 받은 선남선녀 커플
가리봉은 그저 구로동 갈림길 위의 언덕이었을까
아니면 이별의 이정표를 만드는 봉우리였을까
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별로 중요치 않은 듯 보였다.
가리봉동으로, 가야 하는 것은
대자연이 갈라놓은 길조차 하나로 모이는 사랑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모던함과 앤티크함의 경계선 위를 질주하던 그 시대의 유행은
매듭을 가르는 알렉산더의 칼보다
강력한 펜대이기 때문이다.
갈림길을 만드는 봉우리 덕분에
역주행한 두 사람의 길이 하나로 만났기 때문이다.
하트를 그리는 그들의 펜촉이 루비로 조각된 가리봉을 만들었다면
이제 나의 손글씨는 대자연의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알아보자.
이제 사랑은 대자연의 어떤 삶을 그릴 수 있는지 물어보자.
과거와 미래를 이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순간에
현재, 너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