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의미 없어 보였던 순간이 나를 살리고 있었다

리추얼스토리-114

by 미키현 The essayer
ChatGPT Image 2026년 4월 2일 오후 08_58_20.png


미국의 명상적 회화로 유명한 아그네스 마틴은 컬럼비아대학 시절 선불교와 도교 사상을 접했고, 이는 그의 작업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틴은 하루 중 긴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침묵’으로 보냈는데, 그 시간은 생산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마음을 맑게 유지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의미 없어 보였던 시간이 실은 삶을 지탱하는 핵심 리추얼이었던 것입니다.


저만의 그림 명상을 소개합니다. 저는 몽우조셉킴과 성하림, 김예당 화가의 작품을 좋아해서 조금씩 집으로 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그림 전시 포스터를 사서 붙여도 되고, 인화해서 붙여도 됩니다. 그림을 사는 값으로 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으나 제가 그림을 소장하는 이유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의 명상 때문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성화림 화백의 <명상>을 봅니다. 달항아리에 담긴 바다 위 붉은 일출을 보며 힘차고 행복한 에너지를 채워 하루를 시작합니다. 출근하면 제 책상에 몽우조셉킴의 <일체유심조>가 있습니다. 꽃가루가 떨어지고 있는 배경 속 가부좌를 튼 초록빛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업무 중 쌓였던 부정적 에너지가 사라지는 게 느껴집니다. 집에 돌아오면 김예당 화가의 <와인>이 저를 반겨줍니다. 저에게 와인은 축하와 대화의 의미를 가지는데요, 볼 때마다 바로 여기가 축하 자리이며 지인들과 도란도란 함께하는 날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저것 잡생각이 많아지면 몽우조셉킴의 <봄 이루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 그림에는 오묘한 미소를 짓는 한 인물이 있는데 눈만 마주쳐도 생각이 단순해지고 긍정 에너지가 솟아오릅니다. 짧은 시간의 그림 명상으로 저에게 엄청난 힘이 되며, 주말처럼 시간이 여유 있을 때는 그림 멍을 하며 생명 에너지를 충전합니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는 작곡 전후 짧은 묵상(특정 대상을 깊이 생각하는 행위로 종교적 관점에서 기도 및 명상 수행 방법)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종교적 신념을 떠나 정신을 가라앉히고 흐름을 정리하는 리추얼입니다. 안타깝게도 현대인에게 기도는 우리의 곁에 너무 오래 있어서 형식만 남고, 본질은 잊혀버린 대표 사례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멍하니 있는 상태에서도 뇌는 감정 정리, 기억 통합, 자기 성찰을 수행합니다. 명상·기도·조용한 멈춤은 이 회로를 자연스럽게 활성화합니다. 이 세 가지를 우리는 일상에서 다시 발굴하여 리추얼로 삼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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