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가는 대로
버스기사 뒷자리에 앉게 되면, 자연스레 운전석을 보게 된다. 운전자의 업무 공간인 운전석은 각자의 편의에 맞게 조금씩 바뀌어 있다. 대부분 운전자 옆 기둥 사이에는 플라스틱 바구니를 몇 개씩 매달아 잡동사니를 넣어둔다. 왼쪽 구석에는 우산이 몇 개 묶여 있다. 장갑, 선글라스, 안경닦이 등도 얼기설기 엮어둔 끈에 달려있곤 한다. 저런 것을 보관할 자리가 필요한 게 당연한데, 애초에 버스를 만들 때 그런 공간을 왜 디자인해 놓지 않는 걸까?라는 생각도 들었다가, 그렇게 디자인되어 나온다 해도 사용자마다 달리 쓰겠지 라는 생각으로 넘어갔다. 내 부엌도 그렇다. 원래의 목적대로 쓰지 않는 물건들이 많다. 혹은 원래의 기능이 다하면 달리 사용하곤 한다. 사물을 원래의 목적이 아닌, 사용자가 자신의 편의에 맞게 바꿔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 디자인 용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당최 생각이 나지 않네. 변용이라고 해 두자.
가장 흔하고, 또 유용한 것은 고무장갑이다. 점점 끈끈해져서 그릇에 자꾸 자국이 남거나 구멍이 나서 다 쓴 장갑은 팔 부분을 잘라서 고무줄로 쓴다. 길게 늘어나고 엄청 질겨서 매우 유용하다. 가끔 이 고무줄을 다 쓰면 아직도 멀쩡한 고무장갑을 지그시 바라보곤 한다.
어디선가 주는 사은품으로 하나둘 쌓이는 보틀은 보관용기로 좋다. 새 것인데도 새는 보틀이 있어서 버릴까 하다가 고춧가루, 콩, 현미 등을 담았는데 내용물을 적당량 붓기도 편하고 냉동실 문에 보관하기도 좋다.
실리콘 뚜껑. 전자레인지에 국 등을 데울 때 덮으려고 산 실리콘 뚜껑, 설거지하다가 싱크대 개수구 위에 우연히 놓았는데 밀폐 기능을 해서 물이 고였다. 그 뒤로 개수구를 밀폐해서 물을 받아야 할 경우엔 이걸 쓰고 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구멍이 송송 있는 실리콘 찜 망을 샀다. 설거지할 때 개수구 위에 놓으려고. 물론 찜 망으로도 쓸 수 있고.
오래전에 산 프라이팬 세트 중에 누룽지 팬이 있었다. 가끔 누룽지를 해 먹기도 했는데 시판 누룽지가 다양해지면서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꺼내어 거의 매일 쓰고 있다. 이제 누룽지가 아니라 팬케이크를 굽는다. 팬케이크 센베를 굽는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아들이 아침 먹기 싫은 이유로 '아침엔 퍽퍽한 게 싫다. 바삭한 게 좋다.' 길래 와플 기계를 살까, 와플 팬을 사야 하나 하다가 혹시나 하고 누룽지 팬에 구워봤는데 팬케이크 반죽으로 바삭한 센베 느낌 성공. 다만 시럽을 찍어먹기 어려우니 반죽에 설탕을 더 넣는다.
달고나 커피 유행으로 오랜만에 제 역할을 하고 있을 거품기. 한국 요리에서는 거품기를 거품 내기 위해 쓰는 일이 별로 없을 듯하다. 달걀 풀기는 젓가락으로 하는 거 아닌가요 ㅎ. 우리 집 부엌에서 거품기의 역할은 제빵 시 밀가루를 체치는 대신이다. 밀가루를 체에 치면 체 사이에 낀 밀가루 씻는 게 귀찮다. 안 그래도 제빵 한다고 재료를 잔뜩 늘어놨는데 부피 큰 체까지 등장하면 난감. 효과는 떨어지겠지만, 거품기로 젓는 게 편하다. 가끔 쌀도 씻어준다.
부엌마다, 아니 모든 곳에서 다양한 변용의 사례가 있을 것 같다. 당신의 부엌에선 어떤 물건이, 어떻게 쓰이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