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져 가는 마음

<민혁> 6편

"김민혁~, 어디 가지 말고 바로 집으로 와야 한다~"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민혁에게 말을 거는 그녀는 민혁의 새로운 가족이 된 누나 연서다.

외동아들로만 알고 있던 친구들은 명문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고 예쁜 치마를 살랑거리며 친구들과 걸어가는 연서를 신기한 듯이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녀가 지나가자마자, 누구냐고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친구들에게는 아빠의 결혼이야기도, 새로운 가족이야기도 하지 않았던 터라 민혁은 매우 곤란했지만, 그럼에도 밖에서도 자신에게 말을 걸어 인사를 해준 연서가 반갑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곧 소개를 시켜 달라고 할까 봐 입을 꾹 닫았다. 너희 같은 바보들이나 상대할 사람은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자신 역시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연서는 학교가 끝나면 바로 독서실을 가서 공부를 하는 듯했다. 민혁은 연서와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지는 않았고, 공부도 하위권이었으나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공부하면 연서와 같은 대학을 다닐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남몰래 꿈을 키웠다. 그다지 약학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그렇다고 간호사가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지만 아픈 사람을 약하나로 편하게 해주는 학문이라면 공부하고 싶다고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말하는 그녀가 말하는 것이라면 자신도 하고 싶어졌다.


그 후로 민혁은 아빠를 설득해 학원을 다니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손을 놓고 있었던 공부기에 어디에서 어디까지 해야 할지 막막했다. 중학교 공부도 민혁에게는 버거웠다. 몸만 컸지 공부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손을 놓은 탔도 있었으리라. 저녁이 늦도록 스탠드를 켜 좋고 공부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창 밖으로 까만 어둠이 내려앉아있었다. 저녁 12시쯤에는 연서가 자기 방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2층에 민혁의 방을 마주 보고 연서의 방이 있었기에 그녀가 올라오는 소리, 문을 닫는 소리, 친구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루는 공부하던 손을 놓고 그녀가 올라와서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를 기다렸다. 늘 같은 시간이다.

콩콩콩...

하지만 올라오는 소리 끝에 방문이 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부스럭부스럭..

민혁의 방 앞에서 작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툭, 하고 뭔가 내려놓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맞은편에서 방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고 살짝 나가보았다. 문 앞에는 작은 쪽지와 함께 초콜릿바가 놓여있었다.

'민혁아, 요즘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더라. 누나가 수능 끝나면 도와줄게. 오늘도 파이팅!'


작은 토끼그림과 함께 동글동글 귀여운 글씨체..

'누나는 글씨체도 너무 귀엽다. 여자애들은 다 그런가..?'


지금까지 살면서 여자친구는 그래도 꽤 사귀어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 아이들로부터는 글자가 쓰인 그 무엇도 받아본 기억이 없기에 연서의 글씨체와 마음이 생소했다. 하지만 전 여자친구들 보다도 더 깊은 곳에 연서가 들어앉아 있는 것 같았다. 공부를 하다가도 잠시 하늘을 보면 연서의 얼굴이 떠올라 있고, 눈을 비비며 뻗은 손 끝의 커피 속에도 연서의 얼굴이 보였다. 이쯤 되면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었다.


연서를 좋아하는가 보다.

처음에는 그저 가까이 있게 된 무서운 누나였던 연서였다. 하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그녀의 마음과 그녀의 노력들, 그 모든 것이 민혁을 흔들었다. 꼭 그녀와 같은 학교에 입학하고 싶다. 지금의 성적으로는 택도 없지만 2년 반이나 남았다. 마음을 먹고 하면 꼭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해낼 것이라고 자신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노력하면 될 것 같았다.


민혁은 스스로의 감정이 호감에서 사랑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호적상으로는 누나지만 실질적인 가족도 아니다. 그리고 아직 연서는 성을 바꾸지 않았다. '이 연서', 바뀌면 '김 연서'가 되었을 테지만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연서의 마음은 생각도 하지 않고, 민혁은 연서에게로 흐르는 자신의 감정이 커져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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