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 취한 흑미와, 생각에 잠긴 온이
이 집의 오후는 늘 고요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를 알아보는 시간,
햇빛이 방 안에 낮게 내려앉을 즈음이면
흑미는 먼저 잠에 취한다.
흑미는 잠을 잘 때 온 세상을 내려놓는다.
검은 몸을 둥글게 말고,
마치 이불 속으로 스며들 듯 천천히 가라앉는다.
눈꺼풀은 무겁고, 숨은 깊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이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듯이.
이불 위에서 잠든 흑미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멈춘 것 같아
괜히 나도 움직이기가 조심스러워진다.
혹시나 이 평온이 깨질까 봐.
반면 온이는 늘 깨어 있다.
깨어 있으면서도 조용하다.
골판지 침대 위에 몸을 가지런히 접고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는 얼굴로 방을 바라본다.
온이의 눈에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질문들이 담겨 있다.
‘오늘은 왜 이렇게 조용할까’,
‘흑미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이 집은 지금 안전한 걸까’.
온이는 쉽게 잠들지 않는다.
세상을 한 번 더 살피고,
마음을 한 번 더 접어둔 뒤에야
비로소 눈을 감는다.
잠에 취한 흑미와
생각에 잠긴 온이.
둘은 서로 닮지 않았지만
같은 공간에서 같은 오후를 살아간다.
한쪽은 꿈속으로,
한쪽은 생각 속으로.
그 사이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이 장면을 오래 바라본다.
이 집의 평온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누군가는 깊이 잠들고,
누군가는 조용히 깨어 있는 것.
오늘도 흑미는 잠을 맡고,
온이는 생각을 맡는다.
그래서 이 집의 하루는
아무 일 없이,
아주 잘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