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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la Oct 28. 2015

남친에게 쌩얼 들킨 날

어찌 보면 그 날은 나에게 또 다른 생일인지도 모르겠다.


#12 남친에게 쌩얼 들킨 날:
어찌 보면 그 날은 나에게 또 다른 생일인지도 모르겠다.



벌써 20년이 다 돼 간다. 

지금은 많이 쇠락한 목동 로데오 거리. 당시만 해도 그 곳엔 유명 브랜드 상설 매장이 즐비했다. 소풍을 하루 앞둔 난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소풍날 걸칠 옷과 가방을 사러 그 길 한복판에 서 있었다. 가게마다 엄마를 대동한 중고생들로 북적였다.


대여섯 시간이 훌쩍 지나고 해가 저물어 가건만, 나는 옷을 한 벌도 사지 못했다. 엄마의 재촉에 마지못해 고른 가방은 사실 조금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내가 골랐지만 나는 좋아하지 않는 그 가방을 메고, 다음날 난 썩 유쾌하지 않은 소풍을 다녀와야 했다. 그렇게 난,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도 잘 몰랐던 아이였다.






5년 전, 한 남자를 만나고 사귀게 됐다. 나는 그가 반할만한 내 모습만을 준비해서 보여줬었다. 연애는 밀고 당기기를 잘 해야 된다지 않나. 문자도 바로 보내기보단 시간을 조절해가며 보내고, 그가 좋아 죽겠어도 좋다는 표현을 아꼈다. 그게 영리하게 사랑하는 방법인 줄만 알았고, 계획대로(?) 내게 빠져드는 그를 보며 나는 연애를 아주 잘 하고 있다고 자만에 차 있었다.


사귀기 시작한 지 두어 달쯤 됐을까. 어느 날, 퇴근길 전철 안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남자친구였다. 대뜸 지금 어디냐는 것이다. 나는 신길역에서 막 갈아타려는 중이라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였다. 누군가의 팔이 내 허리를 확 휘감았다. 등골이 서늘한 가운데 뒤돌아보자 아뿔싸 그가 서있었다. 


나는 전혀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화장도, 머리도, 옷차림도 빵점이었다. 기르던 중인 앞머리에 촌순이처럼 대충 찔러 꽂은 실핀이며, 콘택트렌즈는 어디 가고 코 위에 떡하니 걸쳐진 안경까지. 아침에 늦잠 자고 일어나 회사에 지각할까봐 헐레벌떡 대충 차려입고 나선 그 몰골 그대로였다. 


의외로 남자친구는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하고는 “놀랐지?”하며 자신의 기습 이벤트 성공에 그저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나는 황급히 얼굴을 가린 채 불같이 화를 냈다. 미리 연락 주지 않은 것을 무척이나 책망했다. 웃고 있던 그의 얼굴에 순간 황망하고 서운한 표정이 어렸다. 


준비도 안 된 못난 모습 보니 속이 시원하냐며 그만 가라고 모진 말을 뱉고 돌아섰다. 나에 대한 환상도 다 깨졌겠고 이제 끝이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뒤따라왔다. 그리고 나를 붙잡으며 말했다. 전혀 못나지 않았다고. 내 눈엔 예쁘기만 한데 왜 그런 것을 신경 쓰냐고.


그 말에 한순간 나는 멍했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이 뭔지도 몰라 끝내 몇 시간이나 아무것도 사지 못한 채 서 있었던 어린 날의 나. 그때보다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다. 난 여전히 나에게 참 무관심했다. 그런 나를 나보다 아껴주는 사람이 여기 있는데, 나는 추레한 몰골보다도 더 부끄러운 내 마음의 못난 꼴만 보이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 하기 바쁜 사람, 남들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이라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은 참 매력이 없었다. 불현듯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남들이 뭘 좋아하는지, 어떻게 해야 남들이 날 좋게 봐줄지만을 고민하느라 정작 나를 살피지 못했다. 스스로 연애 잘 하는 매력 있는 사람이라고 자부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그날부터였다. 그가 좋아할 만한 내 모습을 궁리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은. 나는 그저 온 마음껏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부터 진짜 제대로 된 사랑에 빠져들 수 있었다.


삶의 중심을 내 안에 두고 있지 않았던 나에게 자기 삶의 주인이 되라고 일깨워준 사람. 그가 나의 남편이 된 지도 어느덧 2년이다. 그동안 나는 나를 좀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우리 사이엔 거짓도 꾸밈도 필요 없어진 지 꽤나 오래되었다.


순식간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맛보게 한 지옥과도 같았던 깜짝 이벤트. 어찌 보면 그 날은 나에게 또 다른 생일인지도 모르겠다. 내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준 나의 남편에게 그때는 경황이 없어 하지 못했던 고맙다는 말을 오늘은 해야겠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결혼 기념일, 많이 늦었지만 이 글이 그의 선물에 대한 작은 보답이 되었으면 한다.



고마워요 남편!




Mila의 사는 이야기가 더 궁금하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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