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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la Nov 09. 2015

고등학교를 졸업하신 여러분께 드리는 편지

저 역시도 재수생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14 고등학교를 졸업하신 여러분께 드리는 편지:
저 역시도 재수생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 익명의 독자님으로부터
@Mila 진정한 삶의 목표가, 진정한 어른이 무엇인지 새삼 알게된 좋은 글인 거 같아요~ 안녕하세요? 얼마 남지 않은 수능을 치를 반수생입니다. 저는 이번 반수를 통해서 오히려 제 목표가 무엇인지 헷갈리게 됐어요. 제가 정말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고 오히려 이 사회에서 알아준다는 학벌, 스펙, 경제력을 저도 모르게 제 진로보다 더 신경쓰게 되는 거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중략) 이런 결과주의적인 생각을 어떻게 하면 떨쳐 버릴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나이... 저도 작가님께서 말씀하신 꼰대 문화.. 정말 싫어하는 사람 중 한명입니다. (중략) 나중에 대학 진학 했을 때 나이 차가 신경쓰이네요. 꼰대 부리는 어른도 되기 싫고 이런 나이 차도 신경 안 쓰는 쿨한 어른도 되고 싶습니다. 작가님 조언 듣고자 장문의 글 남깁니다.



저 역시도 재수생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재수생 전문반 학원에 등록하고 첫 수업받던 날, 교실 안을 채우고 있던 침울한 공기가 아직도 생생해요. 처음 보는 친구들과 어색하게 도시락을 먹었죠. 모두들 위축돼 있었고, 우리는 실패자라는 생각이 각자의 마음속에 무겁게 눌러 앉아 있었던 것 같아요.


5교시가 되고 지리 선생님께서 수업을 하러 들어오셨는데, 무덤덤한 표정과 말투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너희 지금 1년 뒤처져서 우울하고 겁나? 괜찮아, 1년 뒤처진 거 그게 뭐 별 거니? 나도 재수해봤는데 살아보니 그거 아무것도 아냐. 우린 남들보다 1살 어린 기분으로 1년 더 살고 죽으면 돼. 얼마나 이득이니?”


한 번도 웃음소리가 나지 않았던 그날 그 교실에서, 그 순간 피식피식 웃음소리가 터져나왔죠. '1년 더 살자'를 다 같이 복창하자는 선생님 말씀에 우린 같이 외쳤어요. 

 “1년 더 살자!”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보다 한 살 또는 두 살 어린 동기들과 서로 말을 놓고 친구가 됐어요. 아직도 서로 이름을 부르는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지요. 1살 더 어린 기분으로 산다는 마음은 지금껏 변함이 없어요. 젊게 살 수 있도록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해주신 선생님께 감사할 따름이죠.     


친구가 되려는 마음만 있다면, 사실 호칭은 중요하지 않아요. 오히려 나보다 어린 사람들을 보며 ‘너희들은 어려서 몰라’라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경계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존중받고 싶으면 존중하라.’ 이 단순한 진리를 잊지 않는다면 삶에서 만나는 어떤 사람을 대하더라도 함부로 여기지 않게 될 거고, 남을 귀히 여기는 사람은 어디에서든 환영받을 수 있을 거예요.






재수생 시절은 하루하루 행복하면서도 동시에 서글펐던 것 같아요. 저는 스스로 자리에 앉아 자습을 해본 적이 없는 아이였기 때문에, 일단 수업 시간에 집중해서 배우고 그것을 자습하며 내 것으로 만드는 경험을 거의 처음 해본 것이었거든요. 배우고 알아가고 쌓여간다는 것의 순수한 재미를 처음 느낀 소중한 시간들이었어요.     


서글펐던 건, 그 소중한 시간들을 꼭 수치화된 점수로써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배움 그 자체가 너무 좋고 즐거운데, 수능시험일이라는 그 단 하루로 이 기나긴 10개월의 과정을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이 마냥 가혹하게 느껴지고 속상했지요.     


저는 대학교에 입학하고 너무나 행복한 대학 생활을 보냈지만, 지금은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점이 잘못됐다거나 아깝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답니다. 대학교에서 배운 것들은 꼭 직업과 연결되어야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 자체로써 제 삶의 빛나는 한 시절인 거죠. 


미래학자라는 사람들이 있지만, 애석하게도 그분들의 예측이 100% 적중하진 않아요. 하물며 우리들은 어떨까요? 누구도 앞날은 알아맞힐 수 없어요. 예측할 수 없는 미래 때문에 지금 내가 내리는 결정들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노심초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내 미래는 나의 의지뿐만이 아니라,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수많은 외부적 요소들이 개입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무언가를 배울 때는,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 배움 자체에서 오는 순수한 즐거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답니다. 무언가를 배우고 공부할 때 내 가슴이 뛰고 재미가 느껴지고 그래서 더 파고들고 싶은 의지가 생긴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거예요.


스티브 잡스는 대학 중퇴 후에 미대의 캘리그라피 수업을 도강한 적이 있다고 해요. 그리고 10년 뒤 매킨토시를 만들 때 캘리그라피를 응용한 폰트 개념을 PC에 최초로 도입했는데, 이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죠. 잡스는 후에 자서전에서 이 일화를 언급하면서 말하기를, “그제야 10년 전 내가 왜 그 수업을 들었는지 알게 됐다”고 했어요.      


『하류지향』이라는 책으로 국내에도 많이 알려진 일본의 학자 우치다 다츠루씨께서 얘기하시길, 배움이란 바로 그런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배우기 시작할 때 목적을 설정하면 안 된다고요. 대학에서 보면 “난 이런 연구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학생일수록 그 연구를 끝까지 해내지 못하는 경향이 강하다고요. 그보다는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이것을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학생들이 진짜 연구자가 되곤 한다고 말이지요.     


사람은 누구도 완성된 상태로 태어나지 않아요. 여러 경험을 통해 배우고 계속 인생의 행로를 수정해 나가며 내가 ‘만들어져’ 가는 것이지요. ‘난 ○○대학에 가서 △△기업에 취직한 다음 연봉 얼마를 받고 살아갈 거야’ 하는 식으로 누군가가 인생 설계도를 만들고 그대로 살아간다고 가정해볼까요? 그 설계도는 아직 경험도 연륜도 부족한 어린 시절의 내가 그렸던 과거의 그림일 뿐이에요. 사람은 매 순간 경험을 하고 배워나가며 새로운 나를 확인하고 앞길을 닦아나가는 존재인데, 그런 경험치가 쌓이기도 전에 만들어둔 어설픈 설계도에 연연한다면 그건 성장을 거부하는 삶 아닐까요? 늘 성공 또는 실패의 성적표에 연연해야 하는 삶은 얼마나 팍팍할까요?






별로 대단할 것 없는 대답이라 들릴지 모르겠지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매 순간을 충실히 살자는 것이에요. 미래보다는 지금에 집중하자는 것이죠. 지금 하고 있는 공부가 나중에 나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까를 고민하기보다, 지금 하고 있는 공부를 통해 순수한 앎의 재미를 만끽하고 제대로 배워서 내 것으로 만들어 놓는 것. 그렇게 내 것을 쌓다 보면, 스티브 잡스가 캘리그라피를 매킨토시에 적용했던 순간처럼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를 이루어내는 경험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재수생이었던 제가 이런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때때로 서글퍼하는 일은 덜했을 것 같아요. 순간을 방종하지 않고 뭔가 스스로 뿌듯해할 만한 작은 성과들을 매일 하나씩 쌓아보세요. 어떤 게 있을까요? 수능 본 지 10년이 넘었으니 어떤 예를 들어야 할지 가물가물하지만... 가령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고 그가 말하는 패러다임의 개념을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어보기? :)     


저는 지금도 길게 내다보고 뭔가를 계획하기보다 매일매일 작은 성공을 하는 것에 집중하려 한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죠. 매일 스쾃 한 개만이라도 하기. 일주일에 글 한 편씩 꼭 쓰기. 이런 실현 가능한 단기적 약속들을 스스로 지켜가다가 이것들이 쌓이면 기대 이상의 결과를 만나게 되곤 해요. 그래서 이렇게 독자님도 만나게 된 것이고요.


제 생각이 정답이 될 수 없음을 잘 압니다. 그렇기에 감히 독자님께 정답이라 할만한 조언도 드릴 수가 없고요. 모쪼록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었던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얻은 이 조그만 깨달음들이 여러분께서 행복한 삶을 꾸려가시는 데에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 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생각보다 긴 글이 됐네요. 이 두 가지를 다시 한번 힘주어 말씀드리고 싶어요.

매 순간을 충실히! 먼 미래는 섣불리 예단할 필요 없음!




Mila의 사는 이야기가 더 궁금하시다면,


https://brunch.co.kr/@mila/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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