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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la Nov 18. 2015

우리가 해야 할 허드렛일

똑똑히 보아야 한다.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15 우리가 해야 할 허드렛일:
똑똑히 보아야 한다.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쓰기 시작한 지 2년쯤 된 손바닥 크기의 수첩이 있다. 

두께가 제법 도톰한 수첩인데 이제 절반쯤 채워간다. 단호박 찌는 법부터 각종 케익과 과자 굽는 법, 병아리콩을 사용한 나의 특제 된장찌개까지, 나만의 요리 비법을 정리해둔 수첩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밥 짓는 법조차 몰랐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도 제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 하나 제 손으로 요리할 줄 모르는 몸만 큰 아이였다. 그런데 내 또래에 나 같은 사람들, 은근히 많다. 제 입도 감당 못 하고 부모가 주는 먹이만 받아먹으며 사는 다 큰 아이들 말이다.


삼십 대가 되어서야 겨우 제 한 몸 스스로 책임지는 삶이 뭔지 알아가고 있다. 수첩에 레시피가 하나씩 늘어가고, 엄마 찬스 안 쓰고 살기에 조금씩 적응해간다. 요리, 빨래, 청소, 분리수거 같은 허드렛일도 내 삶의 당연한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이제야 배운다.


근사한 음식을 차려 맛있게 먹었으면 설거지 거리가 남는 게 순리다. 집안일을 알아서 해주는 살림의 요정 같은 것은 해리포터 책 속에나 존재한다. 귀찮다고 설거지를 미루어 쌓아뒀다간 다음 끼니를 차릴 그릇도 수저도 없게 될 것이다.  






우리 삶의 이치가 다 그렇다. 빛나는 순간만이 전부가 아니다. 때론 지저분하고 불편하고 내키지 않는 일도 직접 해야만 한다. 나는 늘 주인공만 하고, 내 뒤치다꺼리를 도맡아줄 누군가는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돈 주고 사람을 부리면 되지 않냐고?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화장실에서 볼 일 보고 뒤 닦는 일도 더럽고 하찮지만 스스로 해야 하지 않나.


장밋빛 화려한 것, 멋있고 휘황찬란한 것만으로 삶을 채우려는 마음이 얼마나 철없는 것인지 비로소 깨달아간다. 밝고 환한 곳뿐 아니라, 어둡고 그늘진 곳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드높고 힘 있는 자만을 찬양할 것이 아니라, 낮고 힘없는 위치에 몰린 사람들의 손을 잡아줄 수 있어야 한다. 편하고 재미있는 일만 좇을 것이 아니라, 부당하고 부정한 일에도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백남기 선생님께서 위중하시다. 그분의 이력을 읽으며 마음이 아파온다. 유신에 항거하다 옥살이를 겪고 귀향하셔서는 땀 흘려 우리 밀 농사를 지으며 농업 살리기에 매진하셨던 분이다. 불의에 분연히 일어서시고, 부지런히 몸을 놀려 궂은 농사일을 하셨다. 누구나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아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에 투신해오신 분이셨다.



아래 왼쪽이 백남기 농민 / 출처: 가톨릭농민회



백 선생님의 막내딸 백민주화씨는 현재 외국에 거주 중이다. 20일 귀국을 앞두고 그녀는 페이스북에 아버지를 향한 몇 개의 편지글을 남겼다. 

 “나는 삼십 년간 진행중인 아빠 딸이니 내가 잘 알아.

아빠는 세상의 영웅이고픈 사람이 아니야.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지.

근데 아빠..왜 저렇게 다쳐서 차갑게 누워있어? 시민이자 농민으로서 해야할 일을 한건데 왜 저렇게 차가운 바닥에 피까지 흘리며 누워있어? 뭘 잘못 한건지 난 하나도 모르겠는데 누가 그랬어? 

수많은 사진들 다 뚫고 들어가서 안아주고 싶고 피도 내 손으로 닦아주고싶어 미치겠어...”






우리가 외면해왔을지 모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동으로 옮겨오셨던 백남기 선생님. 그랬던 분이 이렇게 쓰러지셨다. 뇌손상이 심해 의식을 찾더라도 정상 상태로 회복되기 어렵다고 한다. 다시는 며칠 전처럼 집회 현장에 두 발로 직접 걸어 나가실 수 없을지 모른다. 이미 쓰러진 69세 노인의 머리 방향으로 캡사이신이 섞인 물대포를 15초 이상 직사한 공권력의 횡포가 그를 사지로 몰았다.


사경을 헤매는 시민을 두고 ‘생명의 지장이 없는 지엽적 사고’라 말하는 사람이 여당 대변인을 하고 있는 판국이다. ‘물 좀 세게 해 어르신이 다쳤는데 문제없다고 본다’는 발언을 한 여당 의원도 있다. 벼랑 끝에 걸린 국민의 목숨을 이렇게 취급하는 사람들이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 자리에 앉아있다.


더럽고 꼴 보기 싫어도 우리는 이런 정치와 공권력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목소리를 내야 한다. 다 같이 투사가 되자는 게 아니다. 적어도 못 본 척 지나치지는 말자는 뜻이다. 


똑똑히 보아야 한다.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총선이 내년이다. 국민을 함부로 여기는 사람들을 국민의 대표자로 뽑아주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우리가 마땅히 챙겨야 할 허드렛일이고 뒤치다꺼리다.




Mila가 나누고 싶은, 우리 사회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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