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훈수의 왕 Nov 24. 2021

<웨스트 월드>가 불러 낸 예술

HBO의 시리즈 <웨스트 월드>를 시즌 1에 이어 시즌 2까지 재미있게 보고 있는 중입니다.


처음 소개할 때 <메멘토> <인터스텔라> <인셉션>등에 등장한 다양한 콘셉트들이 복합적으로 섞여서 놀란의 아이디어가 집대성되어 가는 느낌이라고 이야기했던 것 같은 데, 조금씩 더 빠져들면서 묘하게 다양한 예술과 문학 작품들이 연상되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기억과 그 기억이 깃든 시간과 사물 간의 상관관계를 처음 등장시켰던 마르셀 프루스트인데요, 얼마 전에 새로 출간된 <어느 존속살해범의 편지>란 프루스트의  산문집에 작가 스스로가 밝힌 대목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글을 쓰는 지금 제 손에 책이 들려있지 않은 탓에 좋지 않은 제 기억력에 의존해 보면, 프루스트는 기억이라는 행위를 "의식적 기억"과 "무의식적 기억"으로 나누고 있고, "의식적 기억"은 스스로가 저장하고 싶은 정보들을 담은 그렇기에 의도된 기록인 반면에 "무의식적 기억"은 부지불식간에 나의 내부에 저장된 기록들로 이 기억들은 진실된 순간을 담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무의식적 기억"은 그 기억이 저장된 시간과 그 기억이 연관된 특정 사물들이 현재에 재현되는 특수한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게 된다고 주장하는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서평마다 인용하는 마들렌의 효과가 바로 그것입니다. 




<웨스트 월드>의 호스트(인조인간)들에겐 코너스톤이라는 그들의 행동을 유발하는 근본적인 기저 감정에 관한 기억들이 심어져 있습니다. 당연히 호스트를 만든 인간에 의해 심어진 일종의 "의식적 기억"들이죠.


한데, 몇몇 호스트들에게는 저장장치에서 지워진 어느 순간에 관한 기억들, 그러니까 프로그램되어 있는 의식적 기억이 아니라 자신들이 작동을 시작한 이후에 실제로 현실에서 경험하게 된 특수한 상황에 관한 기억들이 문득문득 떠오릅니다. 이런 기억들에 대한 반응은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기에 일종의 프로그램 오류로 받아들여지고 넘어가곤 했는데,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호스트 스스로 이 무의식적인 기억 속에 남겨진 경험들이 자신의 삶에 진실된 부분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하고, 이렇게 실존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생겨납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드라마에 등장하는 이런 유의 묘사들은 신에게 의지하고 복종해 왔던 중세의 시기를 지나 Enlightment 계몽의 시대를 거쳐 현대적인 인식(사고) 체계로 발전해 온 유럽(서양)인들의 사상사(철학사)등을 압축시켜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얻게 되는 깨달음이라는 의미를 프루스트가 창작한 마들렌 효과가 불러오는 무의식적 기억이라는 장치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프루스트는 독특한 자신만의 장치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의 흐름에 뒤섞인 시간과 그 시간에 결부된 사건들을 개연성 없이 끼워 넣는 방식으로 그의 명성에 혹해 책을 들고 읽기 시작한 독자들을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히게 만들어 버리는데요, 이번 <웨스트 월드>도 역시 주인공들의 기억이 소환하는 장면들을 전체 내러티브가 진행되는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뒤죽박죽 흩뜨려 놓는 바람에 시청자들이 전체 줄거리를 따라가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장면들이 커다란 통시적인 구조하에서 개연성을 갖고 차례로 연결되게 하지 않은 데는 당연히 작가인 놀란의 의도가 숨어 있는데, 드라마 전체를 통해 작가는 계속해서 현실과 가상(환상 또는 상상)의 구분에 대한 우리(시청자)의 인식을 시험하기 위한 질문들을 던지기 위해서 보편적인 드라마 감상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도록 도발하는 것 같습니다.


드라마 덕분에 오랜만에 다시 프루스트의 소설을 집어 들게 되었는데, 나란히 꼽혀 있던 책중에 제 손을 따라 나온 <꽃피는 아가씨들의 그늘에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웨스트 월드>가 이래저래 고마운 드라마가 되어 주고 있네요.




   

매거진의 이전글 웨스트월드 <Westworld>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