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으로 공포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어떤 느낌이나 이미지 혹은 소리들이 떠오르시나요?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를 수도, 혹은 직접 경험한 어떤 일들이나 그런 기억 속의 순간들이 생각날 수도 있겠죠.
그런 공포의 순간들을 돌이켜 본다면,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어떤 것이 더 공포스러울까요?
눈을 뜨고 공포와 직접 대면해야만 하는 상황일지 혹은 주위를 볼 수 없는 다시 말해서 눈앞이 보이지 않아서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는 그런 무지가 스스로의 내면에 알 수 없는 공포감을 심어 가는 상황 일지,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의 첫 장면에서 소설의 화자로 등장하는 이스마엘은 빈방이 없어서 누군가와 침대를 공유하게 되었을 때 홀로 침대에 누운 채 어떤 사람과 침대를 나누어 쓰게 될지를 모르는 바로 '무지'의 상황이 만들어 내는 절대적인 공포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가 식인종이면 어떡하지? 그가 이런 사람이면 혹은 저런 사람이면....'
이렇듯 공포라는 감정은 단순하게 무서운 광경에서만 생겨나는 느낌은 아닌데요, 가장 공포스러운 느낌을 잘 표현해 내고 있다는 다음 그림은 과연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공포감을 느끼게 된 것일까요?
에드바르 뭉크 <절규>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에서 주인공은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자신에게만 현실이 되어 다가오는 극도의 절망적인 심리상태를 표현해 내고 있습니다.
작가 자신은 <절규>를 그리게 된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멈춰 선 나는 죽을 것만 같은 피로감으로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핏빛하늘에 걸친 불타는 듯한 구름과 암청색 도시가 있었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다"
뭉크에게도 역시, 눈앞에서 벌어지는 실제적인 공포 상황을 경험하는 것보다, 자신의 내면 속에서 스스로 끊임없이 공포의 실체가 내 앞에 구현될 것이라고 상상하는 절망적인 심리상태가 더 두렵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상상이 스스로를 절망적인 상태로 몰고 간다면 아마 대부분의 우리는 우리가 공포의 실체를 보고 있다고 믿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뭉크의 귓속을 울리는 절망적인 심리상태가 화가로 하여금 캔버스 전체를 역동적인 곡선으로 휘몰아 가게 만들고, 이런 광기 어린 붓질은 공포, 절망 그리고 고통의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주인공의 뒤편에 산책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인데, 오직 나의 내적 자아에게만 거리를 휩쓸고 가는 공포의 굉음이 끊이지 않고 들리는 상황에 대한 묘사가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들 역시 그림 속 주인공이 고통스러워하는 극도의 공포와 절망감에 빠져버리게 만드는 그림입니다
이런 느낌을 잘 묘사하는 것으로 알려진 또 다른 화가가 있습니다. 영국 출신의 프란시스 베이컨은 무력함과 절망감이 가져다주는 공포를 아주 명확하게 이미지화해내는데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초상화에 따른 연구 (Study after Veláz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
그림 속의 인물은 마치 전기의자 위에라도 앉아 있는 듯이 공포에 질려있는 표정입니다. 수직으로 그어진 직선들은 날카로운 창처럼 인물의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며 계속해서 그를 찌르는 마치 지옥의 고문 장면을 연상케 하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고통이 쏟아져 나올 듯이 절규하는 모양의 입이 보이시나요?
베이컨의 많은 작품 속에서 우리는 그가 과장되게 표현하고 있는 과장된 모습의 입을 발견하곤 하는데, 입은 소리를 내고 말을 기능을 가진 신체 기관이죠.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주체의 능동적인 의지에 따라 행해질 수 있는 행동이지만 대화를 하는 것은 서로 간에 능동적인 참여가 없다면 각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아무런 의미 없는 소음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베이컨은 종종 '나는 공포보다는 외침을 그리고 싶었다'라고 얘기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의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은 진정한 공포는 나의 외침을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점이라는 것은 아닐까요?
즉 화가가 그려낸 이미지에서 보이는 외침의 소리를 관찰자인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렇게 그 외침이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어마어마한 공포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죠.
화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소외'라는 말처럼 공포스러운 단어가 또 있을까?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보게 만들고 하나의 통일된 사고에 집착하게 만들던 전체주의가 몰고 온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만들어 낸 공포를 경험한 베이컨은, 그 원인으로 인류가 서로에게 자신의 귀는 닫고 하지만 상대를 향한 입은 더 크게 벌려 큰 소음을 만들어 내면서 소통이 단절되고 혼돈을 거듭하게 된 역사 때문임을 인식하고 소외를 공포의 이미지로 그려내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회를 이루고 발전해 온 우리 인류가 소통이 단절되면서 생겨나는 소외감을 공포라는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음악에서는 우리의 귀에 익숙지 않은 불협화음이라는 서로 화합이 되지 않는 낯선 음들을 병치시키며 이런 종류의 감정을 재현하는 데 성공하곤 합니다.
스탠리 큐브릭의 공포 영화 <샤이닝>에서 음악은 영화 전반에 걸쳐 공포감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는데요,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사용된 음악은 바르톡의 <<Music for strings, perccusion and celesta>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GJcsTtJ188
익숙지 않은 그렇기에 선입견이나 예상을 뒤엎는 연속적인 소리들은 무엇인가를 알아내고자 하는(결말에 대한 또는 다음 장면에 대한) 영화 관객들의 신경을 끊임없이 자극하며,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불길함'이라는 공포심이 가지고 있는 감정의 핵심을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