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바다에 가면 낙조를 보러 온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제주도라면 아마도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부터 성산 일출봉을 오르려는 분들이 많을 테죠. 그리고 어쩌다 열리는 피카소나 인상파 화가전 같은 좋은 전시회 공간 앞에는 자주 오지 않는 기회를 맞아 세계적인 명작들을 감상하기 위한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곤 하는데,
이렇듯 위대한 예술과 자연의 풍광에서 많은 사람들은 숨이 멎을 듯한 감동을 받게 되고, 이와 같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또다시 경험하고자 멋진 자연 풍광이 있는 새로운 장소로 여행을 떠나고, 좋은 연주회가 열리면 콘서트홀을 그리고 좋은 미술작품 전시회가 시작하면 미술관을 찾게 됩니다.
사실 이런 종류의 행동을 묘사할 때 우리는 감정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교양 또는 문화라는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갖게 되는 일종의 훈련된 심성이라고 많이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이런 부분에 반응하는 느낌들(딱 꼬집어 정의 내리기 힘든 특별한 감동을 전달해주는 감정)을 '심미적 감상' 또는 '심미적 정서'라는 감정의 한 카테고리로 분류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감정은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다양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것들을 좀 더 분명히 인지해내는 감각을 발전시키게 되고, 이렇게 훈련된 감각들이 다시 우리로 하여금 동일한 대상물이나 예술작품을 다시 볼 때 더 깊은 감동을 느끼도록 해줍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분명하게 정의 내리기 힘들었던 특별한 감정에 관해서 칸딘스키의 색채와 형태를 통해 그리고 시각적 인식의 틀을 바꾸어 나가는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들을 통해서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
칸딘스키는 스스로 자신에게 공감각 능력이 있다고 밝혔던 화가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리에서 색을 느끼고 색을 통해 음을 인지하는 감각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인지 일반인들이 미술을 통해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 수 있는지 등에 관한 다양한 이론적인 기틀을 자신의 저서인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등을 통해서 일반인과 후학들에게 전달하고 있으며, 그런 과정에서 특히 색채가 감상자들에게 구체적으로 특정 감정들을 어떻게 전달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런 자신의 이론을 구체화시킨 예가 바로 아래의 작품입니다.
<Squares with Concentric Circles> 1913, 종이 위에 수성물감 구아슈 그리고 크레용, 23.8 × 31.4 cm
<동심원과 정사각형들>을 보면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런 그림은 초등학교 아이들도 충분히 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림을 통해 인지되는 감정들을 어떻게 색의 하모니를 통해 표현하는지, 또 동심원의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색과 형태의 배치가 어떻게 감정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지 등은 미술의 기본 요소인 색과 형태에 관한 높은 수준의 이해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이 어린아이 같은 그림이 현재까지도 많은 시각 디자이너들과 후배 화가들에게 색채와 형태의 조화에 관한 좋은 예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죠.
12개로 나누어진 각각의 정사각형 안에는 겹겹이 층을 이루는 동심원(원의 중심이 동일한 서로 크기가 다른 원)들이 다양하게 색을 변화시키며 특정 색채들이 서로 조합을 이루었을 때의 미적 감상에 관한 탐구이기도 하지만, 칸딘스키가 품어온 근본적인 예술과 철학에 관한 생각을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칸딘스키는 서클(원)이 우주의 비밀을 함유하고 있는 기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며, 우주의 비밀이란 인간이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생명의 비밀에 대한 열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간 본질에 대한 그의 호기심은 그렇기에 그로 하여금 색과 형태의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 인간의 내면에 즐거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한 것 같습니다.
Anish Kapoor의 <Sky Mirror, Red>
인도계 영국 작가인 아니쉬 카푸어는 21세 들어서 매우 명성을 날리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을 볼 때마다 머리에 들어오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저런 상상력을 창조해낼까 인데요,
마치 외계에서 나타난 정체불명의 물체 같은 형태와 재질, 그리고 거대한 크기. 특히나 그의 공공 조각 작품들은 작품이 놓여야 하는 공간과의 조화나 균형을 고려한 느낌이 전혀 없고, 그 거대한 면적을 캔버스 삼아 아주 독특한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펼쳐놓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작품을 직접 보신 분들은 다 느끼셨겠지만, 그의 작품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죠. 작품에 점차 다가갈 때마다 작품이 우리의 시선을 왜곡하고 비틀어버리는 느낌에서 완전히 압도당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의 높이나 거리가 아닌 아주 원거리 또는 높은 위치에서 전체를 잡아낸 사진들을 통해서 보게 되는 이미지들은 그런 개인적인 시각과 반대로 이상하리만치 그의 작품을 담고 있는 공공 공간과 그의 설치물이 하나가 되어 있는 느낌을 받게 되곤 하죠.
<Untitled> 2013, stainless steel and resin, 220.0 x 222.0 x 40.0 (cm)
이렇듯 아니쉬 카푸어가 빚어내는 조형물들이 만들어내는 리플렉션과 디스토션은 예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에 대한 선지자적 예언일까요, 아니면 예술의 본질보다 예술을 둘러싸고 형성된 자본시장을 향한 우리의 비뚤어진 시선에 대한 거대한 메타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