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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Feb 13. 2019

Pink but Junk

누가, 왜, 컴퓨터에게 SPAM을 먹였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명절은 미국에서 건너온 작은 캔 안에 들어있는 햄에 정복당하고 말았습니다.  

정복한 측은 어떻게 자기들이 성공했는지 의아해하고, 정복당한 측도 별반 싫은 기색이 아닙니다.


 이 핑크빛 작은 덩어리는 쌀밥이 주식인 우리에게 짭조름하고 기름진 딱 맞는 반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을 제외하곤 전 세계에서 가장 스팸을 많이 소비하고 있는 나라이기도합니다.


 스팸은 Hormel이라는 미국 회사에서 20세기 초 개발하게 됩니다. 그 당시 미국에서 돼지 어깨 부위의 고기가 많이 남아서 이걸 이용하는 아이디어로 개발이 시작되었다고 하고, 스팸이란 이름은 100불의 상금을 걸고 사내 응모를 통해 정해졌다고 하죠.  하지만 호멜 회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호사가들은 스팸의 이름이 sliced ham에서 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슬라이스드 햄이 스팸이라고 불린 시절이 바로 스팸이 처음 등장하는 때와 맞아떨어진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이 스팸은 2차 대전중 미군에게 육류 단백질을 제공할 수 있는 좋은 수단으로 (캔에 담겨 있어 보관과 운송이 용이한 이점 때문에)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전 세계에 퍼지기 시작합니다.

 하와이나 괌, 오키나와 같이 2차 대전중 미군의 주요 거점이었던 곳에서 스팸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고 지금도 스팸을 사용한 현지식 메뉴들이 꽤 유명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전통 음식으로 먹고 있는 족발이나 아귀찜의 역사가 이 스팸을 이용한 하와이 음식의 역사보다 길지 않으니, 일부에서 말하는 스팸 가지고 만든 걸 하와이 전통 음식이라 할 수 있냐는 반발은 논리성이 좀 떨어져 보입니다)


 또한 미국과 달리 자국의 영토에서 전쟁이 벌어져 황폐해진 연합국에 대한 식량 원조 차원으로 영국과 소련 등에도 스팸이 제공되기 시작하며, 영국에서는 스팸 공장을 짓게 됩니다. 이는 미국이 아닌 곳에서 스팸을 최초로 생산하는 공장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영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단백질 공급원을 하고 있었지만, 이 sliced ham은 자기들이 알고 있던 고급햄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스팸은 뭔가 싸구려 느낌, 거기다가 어디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 싸구려 단무지가 중국집과 분식집 어디에도 등장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그런 이미지를 갖기 시작합니다.


 이런 이미지들을 통해 스팸은 fake meat라는 풍자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기 시작하고,  영국의 유명한 코미디 그룹인 Monty phyton이 스팸의 이런 이미지에 호기심을 갖게 되어, 급기야 자신들의 코미디 쇼인 monty python's flying circus의 에피소드 소재로 사용하게 됩니다.

짧은 아래의 동영상을 통해 그들의 재기 발랄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3gehAcPiCWs 


"egg and Spam, egg bacon and Spam, Spam egg sausage and Spam, Spam egg Spam Spam bacon and Spam " 이라며, 모든 메뉴에 spam이 들어가고 스팸이 싫다고 외치는 손님 옆에서 식사를 하던 바이킹들은 “SPAM, SPAM, SPAM, SPAM, SPAM, SPAM, SPAM, SPAM, lovely SPAM!  Wonderful SPAM!”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쇼를 통해 스팸이란 단어는 의미 없는 짓의 되풀이, 원하지 않는 것이 계속 등장해서 짜증 나게 하는 일과 같은 풍자적 의미를 지니기 시작합니다. (몬티 파이톤을 아주 좋아한 덕후들 사이에선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눈치가 빠르신 분들은 뭔가 떠오르실 텐데요, 스팸은 우리가 매일 먹고 싶은 반찬이지만 바로 매일 출근 후에 메일함에서 지워야 하는 쓰레기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정크 이메일을 뜻하는 'SPAM'이 바로 이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먹는 '스팸'을 비꼬기 시작한 데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20세기 말 (정확하게 1993년 3월) 간단한 메시지들을 주고받던 분산 네트워크인 Usenet상에서 어떤 프로그래머가 실수로 동일한 단어(아무 의미가 없는)를 반복적으로 자신이 속해있는 newsgroup에 전송하게 되고, 이를 본 다른 프로그래머 (아마도 빅뱅이론에 나오는 주인공들 같은 덕후일 거라 예상되는)가 이를 보고 몬티파이톤에서 나온 '스팸'같다는 말을 올리면서 네트워크 상에 의미 없는 메시지, 또는 잘못 보내어진 이메일 등을 스팸이라고 지칭하기 시작합니다.



 이 몬티 파이톤 그룹은 국내에서는 큰 소개가 안되고 있지만, 이들이 만들고 보여준 쇼를 통해 우리의 세상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위에서 소개한 스팸이 그중 하나이고요.

옥스브리지(옥스퍼드와 캠브리지) 출신의 수재들이 주축을 이루는 6인조 코미디 창작 그룹인 이들은 스스로를 쉬르레알 과 다다이즘을 신봉하는 사람들이라고 지칭하며, 코미디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고 있는데, 몬티 파이톤 플라잉 서커스라는 시리즈에서 보이는 테리 길리암의 혁신적인 애니메이션은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현실을 초월한 꿈이나 잠재의식의 세계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쉬르레알리즘의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치, 자본주의, 동성애, 종교 많은 민감한 문제를 코미디로 풀어 버리는 이들은 표현의 방식을 멀리 그리스 로마 시대로부터, 그들이 살고 있던 동시대의 모습에 까지 다양하게 차용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Saturday Night Live도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고 있으며, 특히 Saturday Night Live의 스타, Mike Myers는 자신의 많은 코미디 아이디어는 몬티 파이톤의 많은 프로그램에서 Distilled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Distilled라는 게 원래의 것에서 그 진액을 뽑아낸다는 의미가 있으니, 몬티 파이톤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스스로의 잘난 채를 하는 마이크 마이어스의 자신감도 엿볼 수 있습니다.


 마이크 마이어스의 초기 성공작 웨인스 월드를 보면 그가 얼마나 몬티 파이톤의 충실한 follower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로 SNL을 지나, 오스틴 파워까지 일관되게 써먹고 있는 것도 잘 알 수 있고요.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들의 영향으로 가장 큰 히트를 친 프로그램은 다름 아닌 'The Simsons'입니다.



 심슨의 코믹 코드가 우리에게는 잘 먹히지 않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30년을 이어온 최장수 프로그램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심슨의 최초 기획자는 인터뷰를 통해 몬티 파이몬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내용을 자랑스럽게 밝히고 있습니다.

 아래 링크 걸어드린 심슨의 couch gag를 보시면 이들 역시 쉬르레알 스타일을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지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dbI8kJuSkkY

 

 이외에도 몬티 파이톤 그룹을 좋아하는 일련의 천문학자들은 7개의 새로 발견된 소행성에 몬티 파이톤 그룹 멤버의 이름을 붙이고 있고, 고생물학자들 역시 그들이 발견한 새로운 화석종에 몬티 파이톤을 사용하고 있으며, 심지어 동물학자들도 새로 발견된 동물의 학명에 몬티 파이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상의 많은 덕후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듯싶습니다.


 이들의 스타일은 우리와의 문화적 배경과 시간의 차이 때문에 낯설 수 있지만, 그들이 풍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겠다는 학구열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즐기고 있노라면 우리가 좋아했던 아기공룡 둘리나, 짱구에서 볼 수 있는 만국 공용의 웃음코드가 들어 있음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프로그램마다 등장하는 테리 길리엄의 황당한 애니메이션이 조금 익숙해지신다면 그가 감독한 '히스 레저'의 유작인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을 다시 한번 볼 용기가 생기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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