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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Feb 27. 2019

시간을 뒤 흔드는 사람들

소설과 영화에서 만나 보는 타임머신의 실체들

 201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The favorite'란 그리스 감독의 영화가 여우주연상을 배출해 냅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이전의 영화들인 'The Loster'와 'The killing of a sacred deer'는 상당히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관객에게 익숙지 않은 스토리 전개 방식 때문에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감독인 것 같습니다. 이 감독과 그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생각하다 보니, 문득 우리에게 익숙한 기존 관념을 뒤 흔든 다른 예들이 떠올라 그걸 먼저 다루고 다시 감독으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 생각이 들어서, 이번 편에서는 시간이란 관념에 대한 Distortion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굳이 왜곡이라고 하지 않고 distortion이라고 쓴 것은 왜곡은 무엇인가 정답이 있고 그것을 나쁜 방향으로 그릇되게 알린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distortion은 물리적으로 보면 어떤 물체(피실험체)에 힘이 주어지는 방향에서 그 방향을 약간 뒤틀어서 본래의 피실험체가 그것을 어떻게 견디는지를 파악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사용했습니다.


 시간이란 것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은 시간은 과거에서 시작해서 미래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틀어버리는 개념이 바로 '타임머신'이고요, 그러니까 현재에서 과거나 미래로 가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틀어 버리는 것이죠. 


 문학이나 미술에서는 과거에 대한 회상 또는 미래에 대한 상상을 통해 이런 것들을 비틀고 있는데요, 한 방향으로만 비틀면 그것 역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크게 건드리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과거를 보여주던 미래를 보여주던 순서에 맞게 보여주면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죠. 


 순서에 해당하는 order가 질서라는 의미로도 쓰이는 이유가 좀 더 명확해지시나요?


 그런데 이런 시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셔버리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는 유명한 작품들을 소개하자면 문학작품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한밤의 아이들" 그리고 영화로는 "The Arrival"이 있습니다. 영화의 우리말 제목은 '콘택트'입니다.



 (한밤의 아이들 초판 표지에는 친절하게 시간에 대한 변용을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밤의 아이들 개정판 서문에서 작가 살만 루쉬디는 이런 말을 쓰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한밤의 아이들]을 환상문학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인도 사람들은 이 책이 역사책에 가까울 만큼 사실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한밤의 아이들이 우리에게 '마술적 사실주의'경향의 작품이라고 알려지는 건 많은 부분이 시간에 대한 작가의 의도적 변형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많은 스토리가 시간의 순서와 상관없이 뒤죽박죽 되어서 전개되고 있으니까요.


 작가는 소설의 첫 부분에서 (정확하게 번역본 1부 46쪽 에서)


{ 그때 타이가 소리친다. "어어이! 의사 나리! 가니 지주 댁 따님이 아프다는뎁쇼"

이 짤막한 전갈, 뱃사공이 5년 만에 만난 제자에게 오랜만이라는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수면 너머로 던진 그 말, 여자 같은 입술이 한 가닥의 미소도 없이 

퉁명스럽게 툭 내뱉은 그 말이 시간을 빨리 돌려 버리고, 

그때부터 시간은 빙글빙글, 갈팡질팡, 뒤죽박죽 } 


 이라고 친절하게 앞으로 본 소설 내의 모든 사건들의 시간을 빙글빙글, 갈팡질팡, 뒤죽박죽으로 돌려 버릴 거라고 독자에게 설명을 해주고 시작합니다.


  작가는 한밤의 아이들에서 '시간에 대한 관념'을 새로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시간의 의미를 새로이 발견하고 그것을 지배해 나가고자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한밤의 아이들은 인도가 독립한 그 날밤 자정 (정확하게 시곗바늘이 한 몸이 된 순간) 태어난 아이들입니다. 우연치고는 이런 우연이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지배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우연을 발생시키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들로 영화 "Arrival"을 말씀드리려 하는데요 사실 TV 시리즈물인 "Doctor Who"도 아주 좋은 예인 것 같습니다. 영화 속에서 관객인 우리는 시간의 흐름대로 사건을 보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 과연 인지의 순서가 무엇이 먼저인지에 대한 혼동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관객들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대한 혼동을 일으키려는 것보다, 오히려 영화 전체의 흐름에서 시제 (과거 현재 미래)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요,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통해 지나간 순간들에 대한 시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이래, 그 개념에 대한 아주 훌륭한 표현법의 새로운 발견인 것 같습니다.


 다시 살만 루쉬디로 돌아가 보면, 작가는 초기 작품 '한밤의 아이들'에서는 시간을 뒤 흔들더니, 이후의 '악마의 시'에 가서는 인식과 자각에 대한 관점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내가 배우인가 신인가? 나는 과연 죽었는가 아니면 살아있는가 아니면 부활했는가? 나를 통해 나타나는 현상과  내 본연의 모습인 본질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자각이 생겨나고 이를 통해 신이 되어가는 주인공의 이야기에서 니체의 철학과 불교철학의 향기가 피어오르면서 결론적으로 '아 작가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소설이 기존의 관념들을 깨뜨려 나가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떨어지는 비행기 속에서 낙하하는 시간이 점점 멈추어져 가고, 주변의 사물에 대한 나의 인식이 바뀌어 나가는 장면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로가 세상을 숫자로 이해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우리는 작가와 감독에 의해 작품 속에서는 현재 우리가 보고 느끼는 현실 세상이 아닌, 그들이 준비해놓은 새로운 운동장 안에서 그들의 규칙대로 플레이할 것을 약속해야만 합니다. 그럼으로써 나를 버리고 온전히 작품의 관찰자로 새로이 태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에 대한 본 주제로 다시 돌아와서 생각해 보면, 소설이나 영화의 화자(내레이터)의 입장에서 기억을 더듬어 스토리를 만들어 낼 때 시간의 순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기억이라는 게 바로 그런 것이니까요.


 즉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나'라는 화자가 실존하고 있는 현재의 시간의 선후에 따라, 앞선 시간축상에서 기억하는 기억들이 더 예전 시간에 대한 기억이고 뒤따르는 시간축 속에서 기억하는 기억들이 더 최근  시간에 발생한 사건들이라는 근거는 없습니다. 기억 속에 사건들은 시간의 순서와는 전혀 상관없는 배열로 연상이 되고, 그에 따라 화자는 연상에서 연상을 끌어내 이야기를 지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알랭드 보통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나오는 가장 긴 문장을 가지고 그의 책 '프루스트가 ***'에서 재미있는 텍스트 그래픽을 보여주었는데, 프루스트가 그렇게나 긴 문장을 써야 했던 건 김훈의 소설에서 나오는 끝없는 상황에 대한 묘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바그너의 무한 선율과 '괘'를 같이 한다고 봐야 합니다. 바그너는 Leitmotiv라는 개념을 도입해 오페라 속의 각 주인공 별로 상황별 선율을 지정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서사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하나의 상황이 또 다른 상황을 낳게 되고 이렇게 이야기들은 끝없이 진행되어야 한다면, 한 음악적 모티브가 화성학적으로 종결이 되기 전에 다른 모티브로 연결되어야 하는데, 이를 음악적으로 처리한 기법이 바로 '무한 선율'입니다. (즉 무한 선율은 말 그대로 끝없이 이어지는 선율이 아니고 음악적 기법에서 종결되는 느낌의 화성을 고의적으로 회피함으로써 끝난다는 음악적 감성을 무시해 버리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프루스트가 처리한 방법은 한 문장 안에서 연상이 연상을 낳고 계속 꼬리를 물고 사건들이 이어지게 함으로써, 시간의 선후도 의미가 없고 우리에게 남는 것은 각기 연상으로 시작되는 '스토리' 자체임을 보여주기 위한 문학적 기술에 지나지 않는 것이죠. 다시 말해 그 끊어짐 없이 계속 이어지는 문장의 처음부터 끝을 한 호흡으로 다 이해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의 의도에 따라, 이 공상에서 저 공상으로 시간의 순서 없이 스토리를 흡수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뮤엘 베케트가 그의 책 1권 만을 완독하고 나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편에 걸친 비평을 쓸 수 있었던 배경이 이해가 됩니다.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는 할머니를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눈을 감고 우리 옆에 할머니가 본인의 예전 기억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죠. 할머니들은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하다가 거기서 꼬리를 쳐서 엉뚱한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또 하고. 이걸 듣고 있는 고모는 '엄마 그건 그때가 아니고, 그건 그 사람이 아니고'하면서 이야기의 합리성 및 연계성에 제동을 걸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자(할머니)가 의도한 건, 스토리가 통시성을 지녀야 한다던지, 한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가 합리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그저 그런 일들이 있었고 그걸 기억나는 순서대로 풀어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프루스트와 살만 루쉬디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한밤의 아이들'에서 문학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인류가 그 오랜 역사를 통해 이어온 이야기의 방법을 정확하게 다시 발견하고 재 구성해내고 있는 것이죠.


 많은 구전 동화나 설화 등은 시간의 존재와 상관없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힘은 시간이란 우리의 관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으니까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영어 제목은 지금은 In search of lost time으로 낙찰되고 있는데 사실 최초의 영문 번역본 제목은  이게 아니라 Remembrance of Things Past이었습니다. 과거의 사건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한 사건을 가지고 그 사건이 일어난 모든 시간에 걸쳐 연속적으로 그 시작과 끝을 연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프루스트의 문장은 이렇게 되어있지 않습니다. 매 순간순간이 또 다른 순간들을 찾아내고 연결하고 하면서 긴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매 순간 (아주 짧은 찰나, 마치 매 순간들을 찍은 사진 같은)에 대한 기억이 그 기억을 통해 새로운 것을 연상해 내고 그것이 앞뒤 없이 이야기의 연계성 없이 붙어져 나가는 아주 독특한 장면들을 연결한 GIF 화면의 연속이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기술적인 전말인 것입니다. 


 문제는 살만 루쉬디는 친절하게도 출연진(소설의 주인공들)의 입을 빌어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이러한 전제하에서 이야기할 거라는 설명을 하고 있지만, 이런 시도를 역사에서 최초로 시작한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에 대하여 일언반구 설명이 없이 소설을 풀어내고 있었던 데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어라이벌에서도 외계인을 만나서 그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현재와 엄마로서 아이와 함께하는 미래가(외계인을 만난 순간의 관점으로 보면) 섞여있는데, 더군다나 미래의 모습은 과거에 대한 회상처럼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이 또한 프루스트에서 시작된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 대한 독특한 실험의 연장입니다. 우리는 늘 시간은 순서대로 지나가야만 한다고 믿고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지만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각각의 스토리가 지니고 있는 힘을 믿고 그 순간의 이야기에 집중을 한다면 사실 우리의 삶이 (많은 부분을 기억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의 스토리가) 그렇게 시간의 순서대로 구성되어 있지만은 않은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책에서 배운 것에 너무 집착하여 그렇게 이해해야만 한다는 관습을 버리고 열린 귀와 눈으로 그들의 이야기 하나하나에 집중한다면 우리는 화자의 의도를 훨씬 더 쉽게 들여다볼 수 있고, 그 이야기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즐거움의 마법을 더욱더 즐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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