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거짓말을 올려대기 바쁜 4월의 첫날, 누구의 재치가 더 뛰어난 가를 살펴보기는 이미 꽤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으로는 더 이상 신기할 게 없기에, 오히려 색다른 트위터 글이 제 눈을 끌었습니다.
영국의 펭귄북스에서 " April hath put a spirit of youth in everything." 이라는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트윗했더니, 어떤 분께서 (당연히 예상되는) 엘리엇의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라는 "The Waste Land"의 첫 구절을 달아 주셨네요.
그러자 문득 4월에 대한 느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합니다.
봄의 시작인 4월은 많은 정신들이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새로운 어린 생명들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새로운 힘과 용기, 그리고 새로운 생명 이런 것들은 항상 우리에게 행복함을 가져다줍니다.
근데, 우리는 애써 사물의 밝은 면만을 보고 싶어 합니다. 새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의 그 고통과 인내, 노력은 쉽게 잊혀지지요.
수억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결승점에 도달한 우리는 거기서 끝이 아님을 그제야 깨닫게 됩니다. 마치 대학만 가면 모든 게 다 될 줄 알았던 순진한 고등학생 같은 거죠.
인고의 세월을 9달가량 버텨야 하고, 그러고 나서 첫 목소리를 내면 그 목소리가 말로 바뀌기까지 무수한 오류의 시간을 다시 버텨내야만 합니다. (그걸 생각하면 마늘만 먹고 100일을 버틴 게 뭔 대수일까 싶습니다. 우리가 인간이 되려고 하는 노력에 비하면 100일 정도는 껌일 듯하네요. 우리는 9달을 햇볕을 못 봐야 하는데요).
또 첫 목소리가 나는 순간을 기억해 보세요. 그 첫울음을 내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9개월 동안이나 연습하고 쌓아온) 한순간에 분출해 내야 했는지.
마이키(영화 마이키 이야기의 주인공 - 브루스 윌리스의 목소리)처럼 세상이 즐겁고 신기한 녀석도 있었지만, 오스카(소설 양철북의 주인공)처럼 조숙해서, 세상에 나가봐야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것을 진작에 깨달은 녀석들도 있는데, 어쨌거나 저째거나 우리는 그 힘든 고통을 겪고 세상에 나왔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나오도록 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여성들의 노력과 고통은 제가 겪어보지 못해 감히 쓰질 못하겠습니다 )
엘리엇의 황무지를 인간의 *** 세계의 *** 라는 말로 굳이 설명하는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4월은 젊음과 새로운 생명이 가득한 만큼, 잔인함 역시 그 정점에 도달하는 달임이 확실합니다. 세상은 항상 음과 양의 조화가 이루어지게 마련인 것이니까요.
황무지에는 신기하게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오페라 중의 하나인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가운데 2 대목이 나옵니다.
서곡이 끝나고 막이 오르면 아일랜드로 돌아가는 배의 키를 잡은 JUNGEN SEEMANNS 젊은 뱃사람의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Westwärts
schweift der Blick;
ostwärts
streicht das Schiff.
Frisch weht der Wind Fresh the wind blows
der Heimat zu: towards home
mein irisch Kind, my Irish child,
wo weilest du? where are you now?
(중략)
젊고 멜랑꼴리 한 목소리의 테너가 이 노래로 극의 전개를 알립니다.
다시 말해 이 거대한 낭만 스토리의 시작입니다.
이 낭랑한 시를 읊는 듯한 뱃사람의 노래는 곧 분노한 이졸데의 목소리에 잠겨 버립니다.
그리고 엘리엇은 트리스탄과 이졸데 3막의 첫 부분에서 트리스탄의 시종인 쿠베날과 양치기가 이졸데의 배가 오는지 아닌지를 보면서 대화를 하는 이중창 부분의 제일 끝 대사인
Öd und leer das Meer! Desolate and void the sea!
를 다시금 사용합니다.
이 양치기의 목소리 역시 절망감에 빠진 트리스탄의 목소리에 잠겨 버리게 됩니다.
(황무지에서)
I will show you fear in a handful of dust.
Frisch weht der Wind
Der Heimat zu
Mein Irisch Kind,
Wo weilest du?
“You gave me hyacinths first a year ago;
“They called me the hyacinth girl.”
—Yet when we came back, late, from the Hyacinth garden,
Your arms full, and your hair wet, I could not
Speak, and my eyes failed, I was neither
Living nor dead, and I knew nothing,
Looking into the heart of light, the silence.
Oed’ und leer das Meer.
<황무지>에서는 그 시작과 마지막을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따오면서 그 사이에 <히아신스 소녀>의 이야기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사랑을 주제로 한 오페라 중에 가장 낭만적이며 (달달하다는 게 아니라 미학적인 관점에서 가장 낭만적이라는) 가장 에로틱한 음악을 보여줍니다.
결국은 죽어서 하나가 되는 2명의 사랑 이야기이며,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을 앞에 두고 이졸데가 부르는
'Mild und leise' (일명 사랑의 죽음)은 에로티시즘(엑스터시)의 극적인 부분을 바그너가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숨 막히는 고통을 넘으면 곧 영원한 법열의 순간이 오는 (우리는 수많은 변태들이 극적인 쾌감을 위해 스스로의 목을 조이고 있는 사실을 통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감히 직접 해볼 용기는 대부분의 우리는 없을 테니까요) 바로 그 순간을 노래하는 이 처절하고 느리고 하지만 아름다운 노래를 통해 바그너는 낭만주의의 완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엇은 왜 바그너의 이 부분을 시에 집어넣었을까요? 많은 평론가들은 이것이 의미하는 기호학적인 분석을 주로 하고 있지만 저는 엘리엇이 진정한 시인이었기에 이런 시도가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시가 글을 통해 리듬과 음악을 보여줄 수 있는 장치라고 생각한다면, 이 모더니즘 시 속에 어떻게 언어와 음악을 매칭 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시인의 고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많은 비평가들이 이미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스토리의 연계성에 더하여, 바그너의 음악을 자연스럽게 이 부분에서 떠올린다면 시가 가진 음악성 역시 자연스럽게 읽는 독자의 귀로 들어오게 되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