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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Apr 22. 2019

맛의 시작을 알리는

곡우를 보내며

 며칠 전 4월 20일은 곡우 (穀雨)였습니다. 농경사회를 살아갔던 우리 선조들에게 엄청 중요했던 이날은 도시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저 뉴스에 잠깐 나오고 마는 사소함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보통 과거에서부터 내려오는 날짜와 관련된 이름들은 음력과 관계가 있으려니 하는 선입견이 있지만 태양의 움직임을 따라서 만든 24절기는 양력에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곡우는 매년 4월 20일 또는 21일이 되는 겁니다.


 곡우란 이름의 뜻은 '봄비(雨)가 내려서 백곡(穀)을 기름지게 한다'라고 하는데요, 농사의 시작인 봄에 씨앗을 뿌리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대지에 수분을 공급해주는 시간이 되는 겁니다. 겨우내 건조해진 공기에 바짝 마른 대지가 촉촉이 내린 봄비에 씨앗이 잘 자라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해가는 시점인 거죠.


 제목을 맛의 시작을 알린다고 쓴 이유는 우리가 먹을 백곡(모든 곡식)이 자라나는 시작인 셈이니, 맛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곡우를 중심으로 그 맛을 나누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녹차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아하' 하셨을 텐데요, 녹차의 종류에서 가장 고급에 속하는 우전(雨前)은 이름 그대로 봄비가 내리는 곡우 전에 딴 어린잎으로 만든 차라고 해서 '우전'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가장 처음 수확하는 어린잎으로 떫은맛이 적고 고소하고 부드러움이 강한 차입니다.

우전이 지나고 나서 수확하는 찻잎으로 만든 차는 그 순서대로 세작, 중작, 대작이라고 불리는데요, 잎의 크기가 점점 커지는 것에 따라 붙인 이름들입니다. 우전은 워낙 수확량이 적다 보니, 보통 고급차로 마시는 녹차는 대부분 세작에 속하는대요, 이 세작은 곡우와 입하 사이에 채취하는 잎으로 만든다고 하며, 재미있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많이들 들어보신 작설(雀舌)이란 이름인데요, 조선시대에 붙여졌다고 알려진 이 이름은 참새의 혓바닥처럼 작고 귀엽다는 의미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녹차의 맛에 반한 어느 선비가 그 작고 귀여운 녹차 잎을 보고 아이디어가 떠 올랐나 봅니다.



 이런 녹차들은 가볍고 고소한 맛이 특징인데요, 이 우전차를 마시면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좋은 '쇼비뇽 블랑'의 맛이 바로 저한테는 우전차의 맛과 향을 떠오르게 합니다. 보르도가 원산지로 알려져 있지만 가격과 품질을 모두 고려하면 뉴질랜드산을 많이들 마시게 되는데요,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킴 크로포드, 클라우드 베이 등도 좋지만 제가 마셔본 쇼비뇽 블랑 중에 가장 인상에 남은 것은 'Dog point section 94'입니다. 


 예전에 뉴질랜드 대사관에서 뉴질랜드 와인 판촉행사의 하나로 하얏트 호텔에서 시음회를 매년 개최하곤 했었는데요, 5만원 정도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다양한 와인과 뷔페식 안주를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행사였습니다. 그랜드 하얏트 수영장 옆에 야외 테이블에 세팅된 안주들을 집어 들고 여기저기 와인 수입사의 부스들을 기웃거리면서 테이스팅도 하고 와인 이야기도 하는 즐거운 시간들이었는데요, 이곳에서 섹션 94를 마음껏 마셔볼 수 있었습니다. (섹션 94는 클라우드 베이의 쇼비뇽 블랑 보다 훨씬 비싼 싱글 빈야드의 최고급 와인입니다. 클라우드 베이에서 나오는 최상품인 테코코의 가격 정도입니다)


 행사에 참가 하기 바로 전달에 나온 'Decanter' 최신호에서 이 젊은 와이너리의 프리미엄 와인에 대한 칭찬을 잔뜩 읽고 난 직후였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더구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뉴질랜드 와이너리를 수입하던 회사의 담당자께서는 어떻게 섹션 94를 알고 왔는지 신기하다면서, 행사를 위해 가져오신 2병을 저와 제 지인들을 위해 아낌없이 따 주셨거든요. 


 

(도그 포인트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와이너리의 정경입니다. 도그 포인트란 이름은 최초의 정착민들이 양을 키울 때 그 넓은 땅에 미쳐 펜스를 다 치지 못하고 양치기 개들이 양이 못 넘어가는 선을 지켰던 일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개들이 지키고 있는 선이 바로 목장의 끝이 되는 거지요. 도그 포인트는 클라우드 베이 출신의 2명이 만든 신생업체로 유기농 재배 및 손으로 수확한 포도만을 사용하는 와이너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희 일행은 도그 포인트와 클라우드 베이를 제대로 비교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은은한 꽃향기, 고소한 우전차의 연약함, 거기에 바삭거리는 식감까지, 그 날 이후 저는 매년 곡우가 되면 맛있는 뉴질랜드산 쇼비뇽 블랑과 녹차를   떠올리게 됩니다.


 쇼비뇽 블랑에 관한 해외 테이스팅 노트를 보면 crisp(바삭함)이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쇼비뇽 블랑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아마도 그 의미가 무슨 뜻인지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근데 어떤 분들에게 이 단어는 또 다른 맛을 떠올리게 합니다.

crisps라는 영국식 감자 스낵입니다. 한번 열면 멈출 수가 없다는 미국 유명 브랜드 감자칩의 원조가 바로 이 영국식 crisps이거든요. (영국에서는 우리나라와 같이 생감자로 만든 것만이 crisps입니다. 원통에 들어있는 미국 과자는 감자가루로 만든 유사품인 거라 영국에서도 그런 종류는 potato chips라고 부릅니다)  왠지 모르지만 영국에서는 샌드위치를 먹을 때 이 crisps들을 같이 많이 먹고,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진 미국 샌드위치 프랜차이즈 '서브웨이'에서는 세트를 시키면 이 crisps를 선택할 수 있게 합니다. 


 대부분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원래 그런가 보다 하셨겠지만, 미국에서는 영국이라는 독특함을 떠올리게 하는 마케팅 방법으로 소비자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이런 세트 구성을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먹는 이유가 궁금해서 아는 영국분들한테 많이 물어보는데, 그들도 왜 그런지 정확하게 아는 경우는 드물고, 가끔은 이런 추측을 대답으로 내놓고는 하는데요, 그들식 샌드위치(집에서 만드는 원래 영국식 샌드위치)에는 빵 사이에 치즈나 오이 등으로 간단하게 채우는 경우가 많다 보니 간도 맞추고 포만감도 생기니까 감자칩을 같이 먹지 않았겠냐라고 합니다.


 영국식 샌드위치는 (영국 가정에서 많이 만드는) 사실 서브웨이가 아니라 최근 유행하는 대만식 샌드위치가 훨씬 더 유사하거든요. 


 계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에게는 계절은 항상 어떤 먹을거리들을 떠올리게 하는 좋은 자명종 시계 역할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한식 체인이 이름에 계절을 쓴 건 다 이유가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이제는 저에게 떠오르는 어떤 음식의 (특히 과일)의 계절감과 제 아이에게 떠오를 계절감이 같지 않다는 생각에 조금씩 생활의 편리로 대변되는 문명화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듭니다. 


 아마도 나이를 먹는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이제 끝물인 딸기를 보면서, 좋아하던 목련이 지고 나면 침이 가득 고이는 딸기를 기다렸던 오래전 제 갬성을 얘기하는 건 우리 아이에겐 그저 재미없는 아재 개그의 하나처럼 여겨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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