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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Nov 10. 2019

의자는 계급장이다

007 시리즈 / 하녀 

'사회적 동물'에 관한 '동물 행동학'의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 동물 집단 속에는 '알파'라고 불리는 집단에서 가장 높은 계급과 서열을 가진 개체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종에 따라 수컷이나 또는 암컷, 어떤 경우에는 암수 한쌍이 알파가 될 수 있으며,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은 알파에게 존중을 표하거나 종마다의 복종을 상징하는 신호를 보낸다는 데요, 사회적 동물인 우리 인간 역시 항상 집단속에 우두머리가 존재했고, 그 우두머리를 구분하는 즉 권력을 상징하는 다양한 도구나 상징들이 쓰여왔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영화 속에서 이런 권력을 상징하는 기호로 의자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판타지 영화들에 등장하는 판타지스러운 의자부터 한번 보시죠.



얼마 전에 끝난 TV 시리즈 <왕좌의 게임>에 등장하는 철의 의자입니다.  정복당한 왕들의 칼을 녹여 붙여 만든 의자로 절대 권력을 향한 욕망이 불러내는 피의 역사를 성공적으로 이미지화하고 있습니다.



영화 <300>에 등장하는 페르시아의 왕 Xerxes의 왕좌입니다. 페르시아의 대군과 스파르타의 300 정예용사를 대비시키고자, 페르시아의 왕을 비현실적으로 크게 보여주고 있는데, 그가 앉아 있는 의자가 페르시아의 위용과 거대함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 <토르>에 신들의 왕 오딘의 왕좌입니다. 지상 위에 존재하는 신들의 영역을 표현하기 위해 수평의 둥그런 원형 뒤로 수직으로 솟은 사각형 상징물을 대비시켜 천상천하의 느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곤도르 왕국의 왕좌입니다. 비어있는 왕좌와 아래에 앉아 있는 섭정의 의자를 통해 권력의 크기를 상징해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위의 의자들에 실제로 앉아 있으려면 엉덩이가 꽤나 아플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좀 더 현실에 가까운 영화 속의 상남자들이 선택한 의자, 실제로 구입할 수 있는 의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상남자 하면 뭐니 뭐니 해도 <007 시리즈>가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되는데, 주인공의 멋진 슈트발에 어울리는 의자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007 시리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유명 브랜드는 사무용 의자로 유명한 독일의 interstuhl입니다.

사무용 의자라고 하지만 이런 고급 브랜드의 제품은 변호사나 컨설턴트 같은 전문직 종사자나 회사의 CEO들이 주로 사용하는 의자입니다. 아마도 007에게 이런 세련되고 품위 있는 이미지를 더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1962년 최초의 의자를 생산하기 시작한 젊은 회사( 독일 기준으로 1962년은 젊은 축에 속합니다)인 Interstuhl은 대장장이 출신의 부자가 새롭게 열릴 가구 시장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금속을 다루는 자신들의 기술을 가지고 새로운 개념의 의자를 개발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들이 최초로 특허를 받은 상품은 다름 아닌 높이 조절식 의자였는데요,


상판과 등판은 오스트리아의 토넷이 개발한 벤트 우드 방식으로 대량생산에 적합한 디자인을 채용하고, 높이 조절 방식은 세로축의 강철봉에 구멍을 내어 의자 다리의 가운데 넣고 이를 좌판과 연결한 후 높이(단)를 조절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좌). 이러한 그들의 아이디어는 현재 가스 실린더 타입으로(우) 바뀌긴 했지만 가장 표준적으로 사용되는 의자 높이 방식의 원형이 되고 있습니다.


 이 회사의 의자 중에 007에 등장하는 모델들은


KINETICis5와 MOVYis3 가 Spectre에 등장하고 있고



Silver chair 262s가 Quantum of Solace에 등장합니다.



아주 모던한 느낌의 CEO 사무실을 연상케 하는 의자입니다.


그리고 Skyfall에서는 3C42가 등장합니다




이런 현대적 디자인의 사무용 의자들이 최근 시리즈를 장식하고 있는데 반해, 과거의 007 시리즈에는 독특한 디자인의 소파와 카우치 체어들이 등장했습니다.


 우선 이태리 명품 가구 브랜드인 B&B Italia의 Serie Up이 <Diamond forever> 편에 등장합니다.



 B&B Italia는 뛰어난 제조 기술을 가진 생산자가 어떻게 디자인적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지의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는 브랜드입니다. 그들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소리에 적합한 디자인을 해 낼 수 있는 뛰어난 디자이너와 협업을 통해 시장을 놀라게 해왔습니다.

위의 Serie UP 시리즈는 69년에 처음 등장한 제품으로 이태리의 명 건축가 이자 디자이너인 가에타노 페세의 디자인입니다.



이 제품은 당시 유행하던 우주시대 컨셉에 맞는 원형의 디자인과 새로이 등장한 폴리우레탄 폼의 성형기술을 통해 태어났습니다. 소파와 스툴을 줄로 연결하여, 마치 감옥에 갇힌 죄수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연상케도 하는데,  당시 유럽에서 제기되었던 사회 문제들, 계급 간의 갈등, 소수자에 대한 억압 등을 표현하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소파는 하나의 통 몰드로 만들어진 폴리우레탄 폼으로 최초 발매 시에 압축 비닐 포장을 해서, 배달된 제품을 집에서 개봉할 경우 납작하게 눌렸던 제품이 서서히 올라오며 형태를 갖추는 마법 같은 연출로도 이슈가 되었던 제품입니다. (현재 인터넷에서 팔고 있는 유사한 소재의 매트리스가 돌돌 말려 압축 포장되어서 오는 것과 같은 원리인데, 이 광경을 보고 있는 70년대 전후 소비자들의 놀란 모습이 상상이 되시나요?)



임상수 감독의 2010년 <하녀> 리메이크 버전에서도 멋진 디자인의 의자들이 계급을 상징하는 기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임상수 감독은 이 리메이크 버전의 하녀를 위해 특히 세트에 많은 공을 들였다고 하는데요, 메인 거실에 한스 웨그너의 옥스 체어가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남성 캐릭터들의 계급을 드러내기 위해 많이 사용되는 의자들이 <하녀>에서는 오히려 여성 캐릭터의 지위를 상징하는 기호로 많이 사용됩니다.


하녀 은희가 처음으로 남자 주인을 만나는 장면인데, 앉으라는 남자 주인의 말에 은희는 옥스 체어에 엉거주춤 앉고 있습니다.



신분상승을 꿈꾸는 그렇기에 주인 남자와 불륜도 마다하지 않는 은희의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를 복선으로 보여주는 장면인 듯합니다. 아직은 그 지위에 걸맞지 않기에 의자에 앉는 자세가 영 불편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점점 얼굴에 교만이 끼고, 화장이 짙어지는 은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화에는 임스 라운지체어도 등장하는데, 벽난로 앞에 놓여 있는 의자가 호사스러움을 정확히 이미지화하고 있습니다. 같은 하녀이지만 조금 더 지위가 높은 병식(윤여정)이 와인잔과 책을 들고 벽난로가 타고 있는 앞쪽 의자에 앉아서 서 있는 은희를 상대합니다.



이 장면 역시 의자에 앉은 병식의 모습이 어딘가 부자연스럽습니다. 와인잔과 책이라는 그녀의 위상을 암시해줄 기호를 양손에 들고 있는데, 자고로 편안한 휴식이란 내가 마시고 싶을 때 와인잔을 들고 그게 아니면 내려놓을 테이블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양손에 무언가를 들고 벌서는 모습처럼 앉아서 자기보다 더 아래의 계급에 속하는 은희를 향해 작은 권력이라도 과시하려는 모습입니다.


마치 소작농에게 큰소리치는 마름처럼 보이지 않나요?  호랑이가 없는 곳에서는 여우가 왕 노릇한다는 말 이 있죠.  영화에서는 그런데 그 여우가 자신의 얼굴에 맞지도 않는 커다란 호랑이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이렇듯 영화 하녀에서 보여주는 이 두 의자는 단순한 지위의 높고 낮음만이 아니라, 계급 속에 끼어든 신분상승에 대한 욕망이 우리 사회 속에서 얼마나 뒤틀린 허상으로 존재하고 있는가를  암시하고 있는 기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치 맞지도 않은 옷을 입고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 어린아이들처럼 위장된 계급의 유치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하는 도구로서 말입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때가 2010년이었는데, 현재에 와서는 더 이상 여성의 존재감이 의자라는 물리적 상징에 의해 약해지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인기리에 종영된 <왕좌의 게임>에서 칼의 의자에 앉아 가장 카리스마를 빛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세르세이 왕비였으니까요

 


남성 위에 군림하는 지배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이 25년 만에 엄청난 변화를 맞고 있다는 점을 아래의 사진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직립 보행이 우리 인간을 다른 동물군과 구분시켜준 큰 특징 중에 하나라고 하지만, 중력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 인간들은, 직립하고 있던 인간 역사의 모든 순간 동안 역설적으로  끝없이 앉아 있는 것에 대한 동경을 해온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 보니 앉음이라는 행위에 대한 우리의 무한한 동경은, 즉 우리가 가구 중에서도 의자라는 이 대상물을 그토록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본능 속에 남아있는, 기어 다니던 동물에 대한 태생적 한계를 지속적으로  일깨워 주고 있음 때문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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