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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Feb 04. 2020

사랑,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한 번의 순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오랜만에 영화의 장면들을 떠올리며 계속 곱씹게 하는 그런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Céline Sciamma 감독이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을 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입니다.


Finish 가 긴  와인의 향기가 목을 넘긴 후에도 계속 코에 잔상을 남기는 것처럼 영화관을 나와서 며칠이 지난 후에도 영화의 장면들이 지속적으로 새로운 느낌을 가지고 머릿속에 재현되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첫 장면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잠이 들었다. 그는 그녀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열기 있는 그녀의 호흡은 보다 빨라졌다.  (중략)

그에게는 그녀가 이미 여러 해 동안 그의  곁에 있었고 이제 임종의 자리에 누워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갑자기  그는 그녀가 죽은 뒤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중략)

  이제 그는 창가에  서서 바로 그 순간을 생각한다. 그것이 이런 식으로 그에게 나타났던  사랑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었던가? 그녀의  곁에서 죽고 싶었던 느낌은 명백히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 그녀를 자기 삶에서 겨우 막 두 번째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히스테리가 아니었던가? "


사랑이라는 이야기에는 항상 그것에 관한 두 가지 시선이 존재하게 됩니다. 내가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과 상대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대부분 우리는 나의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상대도 그렇게 나를 바라볼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소설에서 밀란 쿤데라는 토마스와 테레사의 첫 만남을 통해 사랑에 관한 하나의 시선과 사랑에 관한 보편적인 사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우리가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순간 이전에 이미 우리 곁에 도달해서 우리로 하여금 일상적인 사고 범주에서는 발생하지 않을 상상 너머의 순간을 꿈꾸게 합니다. 토마스는 갑작스레 자신이 무릎을 꿇고 잠자는 여인을 내려다보는 순간에 이 장면이 바로 '그녀의 마지막 순간'이 아닐까 라는 판타지를 꿈꾸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감정에 사로잡힌 자신의 영혼을 이성의 세계로 끌어 오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는 그 감정을 "히스테리"라고 스스로 명명합니다.


이 장면을 통해 밀란 쿤데라는


"그" 그리고 "그들"은 그 순간(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에 대한 확신이, 다시 말해 사랑이란 감정에 대한  자기 확신이 없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설 밖 현실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우리들에게는 "사랑의 순간"에 대한 확신이 있을까요? 있다면 과연 그 확신은 어떤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까요? 또는 확신이 없다면 그것을 경험하는 몇몇의 특수한 사람들은 그 순간을 어떻게 확신하고 있을까요?


이런 궁금함에 관해서 감독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닌 여성과 여성 사이의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나의 시선이 아닌 그들의 시선을,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내가 쉽게 경험하기 힘든 완전히 다른 시선일 수도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둠이 그 정점에 달한 순간, 그곳에는 많은 여인들이 모여 있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웅얼거리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한 명 두 명 늘어나 웅얼거림은 점차 짙은 소음을 만들어 내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그 짙은 소음을 뚫고 손뼉을 마주치며 "non possum fugere"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영화를 위해 유일하게 만들어진 음악인 이 “La Jeune Fille en Feu”은 감독의 이전 영화에서도 같이 호흡을 맞췄던 프랑스의 음악 프로듀서 "Para one" 이 만들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lUCkOAmaKg


Para One의 대표작인 "You too"입니다.


음악 스타일은 주로 일렉트로닉 뮤직인데, 감독은 도대체 왜 이 음악가와의 작업을 선호했던 걸까요?


이번 영화를 위해서 Para one은 18세기 음악의 멜로디와 리듬 등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는데, 몇 가지 데모 버전을 들어본 감독은 영화를 위해서는 좀 더 현대적인 음악이 맞을 것 같다고 초기 버전을 다 거절했다고 합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Para one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사용된 Ligeti의

Requiem 중 Kyrie 부분에서 영감을 받아 곡을 완성하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WqxPp6SvMw


 "키리에"는 주님(퀴리오스)을 라틴어 문법에서 호격으로 부르는, "주님 이시여"라는 뜻 입니다. 그렇기에  죽음을 애도하는 레퀴엠에서 키리에 부분은 "죽은 자의 영혼을 자비롭게 거둬주소서"라는 기도에 해당합니다.  Ligeti의 <레퀴엠>에서는 수많은 영혼들의 외침이 켜켜이 쌓여 올려져 궁극의 자비를 구하는 순간을 매우 극적으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숲에 모여든 여인들이 부르는 노래의 첫 부분이 이 Kyrie와 흡사하지 않나요?


https://www.youtube.com/watch?v=Sr04s6IfxAQ


Ligeti의 음악에서 도드라지는 특징은 바로 소리의 밀도입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쓰였던 Ligeti의 또 다른 음악 "Atmospheres"도 한번 들어 보시죠


https://www.youtube.com/watch?v=jUaPwTL5vL8


  이 음악을 이전에 경험하신 분들 대부분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영화 장면 속에 등장하는 음악을 들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케스트라의 실황 연주 장면을 골라보았는데요, 영화 속에서 음악을 들었을 때의 느낌은 특수한 악기나 전자악기 등의 효과를 통해서 만들어진 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하지만 동영상으로 보시는 것처럼 전통적인 편성의 관현악단을 통해 만들어지는 소리입니다.


Ligeti의 이 Atmospheres에서 위에서 언급했던 소리의 밀도를 재차 확인할 수 있는데요,

3분 14초경 현의 미세한 트레몰로로 시작돼서 점차 관의 소리가 비중을 높여 나가다가 3분 40초경 피콜로들이 아주 높은 고음을 내면서 목관들이 합주를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피콜로가 지속적으로 가장 높은 고음을 유지하다가 갑자기 3분 50초경 가장 저음을 내는 콘트라 베이스가 순간적으로 가장 높은음에서 가장 낮은음으로 변화를 가져옵니다.


현이 만들어 내는 두께감, 한 없이 가벼운 목관의 소리들이 쌓아 나가는 소리의 깊이와 밀도감, 그리고 찾아오는 거대한 변화 


하지만 이 모든 음악적 변화가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실제 보고 있지 않으면 이렇게 많은 악기들이 그토록 극적인 변화를 연주하는지 알아차리기 힘들죠.


우리가 숨 쉬는 대기는 무수히 많은 기체 분자들로 인해 아주 두꺼운 공기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무수히 많은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지만 일상 속의 우리들은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항상 가장 높은 피콜로 음에서 가장 낮은 베이스로 에너지가 전이되는 것 같은 엄청난 변화와 움직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죠.


다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는 영화의 장면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언제 이렇게 많은 여인들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노소를 막론하고 많은 여인들이 모여서 만들어 내는 이 한밤의 축제의 장에서 엄청난 변화와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수많은 감정들이 목소리를 통해 공기 중에 퍼지고 있고, 더 이상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무의미한 소리가 만들어 내는 감정의 밀도가 빽빽해졌을 때, 바로 그 순간 맑은 목소리들이 울려 퍼집니다.

"non possum fugere" 아카펠라가 만들어 내는 돌림 노래가 점차 그 피치를 높여 나가면서,


밀란 쿤데라가 소설 속에서 그려낸 평범한 우리들의 감정이 치환된 "그"와 "그들"은 확신하지 못했던 바로 그 순간을, Céline Sciamma 감독은 그녀들을 등장시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들은 "사랑"이 만들어 내는 이 미세한 하지만 아주 농도 짙은 감정의 변화를 정확히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죠.


미망의 공간을 가르며 지혜를 가져다주는 빛의 탄생처럼, 그렇게 모든 의심과 혼돈을 빨아들이고 불태우는  사랑의 감정이 탄생되고, 그렇게 엘로이즈가 불에 휩싸여 버린 바로 그 순간을 마리안느는 자신의 그림 속에 영원히 옮겨 놓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감독이 여성들만을 등장시켜 사랑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지에 대한 확인이 가능합니다.

통상적인 남녀 관계에는 오랜 역사를 통해 만들어져 온 관념에 대한 선입견들이 있습니다. 그들 사이의 시선은 순수하고 평등하게 시작되지만 점차 계급의 상하 관계가 형성되며, 이성이 침범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부분을 정확하게 밀란 쿤데라가 보여주었다면, 감독은 그런 부분을 배제해서 순수한 사랑에 대한 발단 전개 결말을 보여주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영화는 첫 장면에서 마리안느의 입을 통해 관객들에게 시선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시작합니다.

감독은 관객들이 그녀 또한 정해 놓은 규칙에 따라 행동했던 지금까지의 통념을 깨고 새로운 감각으로 사랑을 바라보게 만들고 있습니다.


미술 수업을 받는 학생들을 위해 초상화의 모델처럼 포즈를 취하던 마리안느는 학생들을 향해 즉 그녀를 바라보는 우리 관객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먼저 윤곽을, 아웃라인을 너무 서두르지 말고"


사랑이 과연 무엇일까요?

누군가를 이해하는 걸까요? 아니면 그 사람의 모습에 사로잡히는 걸까요?

우리는 일단 사랑에 빠지고 나면 내가 사랑에 빠진 대상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하게 됩니다.

집착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모습에 사로잡히고, 그 사로잡힌 모습을 계속 보고 싶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그 상대의 모습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바로 그런 순서로 말이죠.

그렇다 보니, 사랑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우리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순간들에 작용하는 순수한 시선을 배제한 채 자꾸만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나 대상의 본질에 관한 핵심을 꿰뚫어 보는 것이라는 생각(오해)를 가지기 십상입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바로 이렇게 보편적인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선입견을 깨기 위해, 마리안느의 첫 대사를 통해 관객들에게 어떤 특정한 시선으로 우리를(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봐달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화면을 따라가면 관객들은 마리안느의 시선을 통해 엘로이즈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따라 엘로이즈의 윤곽을 떠 올리게 됩니다. 토마스가 잠자는 테레사의 옆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것이 사랑일까 하고 느끼는 바로 그 첫 순간처럼 말이죠.



그리고는 감정이 더해지듯이 캔버스에 터치들이 더해져 가며 점점 더 대상의 세부적인 모습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장면들 뒤에는 프랑스의 Oil Painter 인 Hélène Delmaire의 얼굴이 숨겨져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엘로이즈의 모습을 그려낼 때마다 등장하던 마리안느의 손이 바로 이 화가의 손입니다.


피렌체에 위치한 Angel Academy of Art에서 전통적인 기법의 Oil Painting을 공부한 그녀는, 하지만 그녀가 배운 지식의 경계를 넘어서는 현대적 감각으로 독창적인 작품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작가 스스가 밝히고 있는 그녀의 작품 세계는 "fragility를 통해 Strength를 보여주는 것" 이라고 합니다.

Fragility는 캠브리지 영영사전에 의하면 "쉽게 상처 받거나 부러지는 성질"이라고 하는데, 이를 통해서 강함을 보여주겠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녀의 그림에 등장하는 많은 대상들은 눈이 가려지거나 얼굴이 사라진 채로 우리에게 보이고 있는데, 대상 자체의 핵심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의지일까요? 상처 받거나 부러지는 내면을 차단시킴으로써 강인함을 드러 내려고 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그녀의 터치나 사용하는 색감을 보면 그녀의 그림은 그다지 수동적이고 방어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저에게는 그녀의 fragility는 feminine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며, 우리가 관습적으로 가져왔던 여성성에 대한 터부를 무너뜨리려는 강인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성에게 가해졌던 폭력을 감추고 피하는 대신, 그것을 떳떳하게 드러내고, 거기에 여성성을 가진 색과 요소(꽃과 같은)를 강조함으로써, 과거에 강함이라고 여겨왔던 남성적이고 육체적인 의미로서가 아닌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의 strength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느낌입니다.


이런 작가의 예술관이 감독인 Céline Sciamma와 좋은 하모니를 이뤄서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들이 오랜만에 명작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게 된 것 아닐까요?


피니쉬가 긴 이런 향기로운  영화의 잔향을 음미하면서 동시에 영화가 가진 서사 구조하나하나 이성적으로 분석해 나가는 차가운 시선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이야기에 마주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시선이 존재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면

사랑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는 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사용된 음악과 미술은  감성적 시선으로 우리가 가졌던 사랑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진솔한 모습의 새로운 사랑을 따라가게 해주는 좋은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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