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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Apr 19. 2020

<프로메테우스><커버넌트> '믿음'에 관한 새로운 신화

"사람들이 더 이상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믿는다" - G.K.체스터턴





영국의 "intellectual historian"인 피터 왓슨의 <The age of nothing>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영국과 달리 책의 제목을 바꿔서  <The age of Atheists>로 출간되었으며, 한국도 이를 번역해서  <무신론자의 시대>로 출판됩니다.  언론인 출신인 저자는 니체 이후 역사의 각 시간대 속에 담겨있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드러내는,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며 생겨난 사회적 현상인 "신" 또는 "종교"에 대한 반박내지는 부정과 관련해,  다양한 사상적, 심리학적 또는 예술적인 대안 또는 해결책들이 어떻게 제시되어 왔는지를 통시적으로 엮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니 갑자기 머릿속으로 <에이리언>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프로메테우스>와 <커버넌트>의 장면들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피터 왓슨이 제시하고 있는 다양한 문화 보기를 바탕으로 영화를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영화들을 감독한 리들리 스콧은 호불호를 떠나 참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오락물과 자신이 하고 싶은 창작 사이에서 아주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그래서 <에이리언 : 커버넌트>도 개봉하자마자 서둘러 극장에서 보고 왔던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에 관해서 <해석에 관한 재미있는 보기들>이라는 제 다른 글에서 잠깐 언급을 

한적도 있습니다.


 https://brunch.co.kr/@milanku205/210





영화를 관통하는 중요한 질문들 :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또는 누가 우리를 창조했는가? 


에이리언이란 외계 생물체가 가지고 있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처음 떠오르는 질문들은 누가 또는 무엇이 이런 괴물 같은 생물체를 만들었을까라는 종류의 의문일 것입니다. 

이런 의문들은 자연스럽게 창조 또는 진화라는 개념들과 연결되고, 결국 에이리언이 아닌 우리들 자신이 어디에서 시작했을까라는 질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런 연쇄적인 의문이 에이리언의 프리퀄을 만들기로 한 감독에게 가장 합리적인 질문이 아니었을까요?

"왜 프리퀄을 만들어야 할까?" "에이리언의 이전엔 무엇이 있었을까?"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던 감독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와 그리고/또는 "누가 우리를 창조했는가?"라는 관점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프리퀄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리들리 스콧의 최신 영화들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많은 오류들이 양산되는 지점이 발견되는데,

바로 감독이 '무신론자'라는 오해입니다. (국내의 여러 영화 관련 기사나 블로그에서 감독이 무신론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감독 스스로가 밝혔다면서 말이죠)


감독은 <엑소더스 : 신들과 왕들>의 개봉 이후 다양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나는 불가지론자이다"라고 언급을 했는데, 이 '불가지론자'가 국내에서는 '무신론자'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죠.

불가지론자란 엄밀히 말하면 '신'이란 존재에 대해 믿지도 또는 못 믿지도 못하는 상태라고 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런 모습들이 국내에서는 불가지론자를 무신론자라고 오해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불가지론자'는 무신론자에 가까운 '다윈론자'들도 많지만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은 있지만, 그것이 특정 종교가 주장하고 있는 특정한 '신'이라는 증거를 믿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감독도 이 범주에 들어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엑소더스:산들과 왕들>의 인터뷰에서 밝힌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만족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라는 그의 대답으로 유추해 본다면, 그에게 우연에서 시작된 후 진화를 통해 고등생물로 발전해간다는 진화론적 믿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감독의 이런 의심과 고민의 흔적은  <프로메테우스>와 <커버넌트>를 통해 관객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결정론적'인 관점으로 감독의 영화가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해석은 감독이 의도하는 바를 전혀 이해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신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자신이 구하지 못하는 답에 관한 질문들이니까요




<커버넌트>의 첫 장면은 무척이나 독특합니다. 스토리 전개상 이 부분은 사실 <프로메테우스>의 시작 부분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관객들은 <프로메테우스>의 기초가 되어야 할 이야기를 후편인 <커버넌트>를 통해 보게 되는 것이죠.

 


감독은 아마도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새로운 관객들을 대상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을 텐데, 

<프로메테우스>를 보고 난 에이리언 마니아들이 새 영화를 이전 <에이리언> 시리즈들과 집요한 연결시키는 것을 보고, 그가 실질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질문들이 가려진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첫 장면의 시작은 인간의 인체가 가진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보여주려는 듯, 화면을 가득 채운 사람의 눈이 등장합니다. A.I로 영화에 출연하는 파스벤더의 눈입니다.

(파스밴더의 눈을 보며, 남자의 눈도 신비로울 수가 있구나 라는 생각이 불현듯...) 


웨이랜드가 창조해 낸 피조물인 AI 데이비드가 완성된 후 처음으로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보는 장면인데요.



W : How do you feel? (AI가 feel이란 동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나요?)

D: Alive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역시 우리들에게는 인간만이 가져야 할 특권으로 인식되고 있지는 않은가요?)

W : What do you see?

D : White Room

     chair, Carlo Bugatti throne chair.



데이비드가 살아 있음을 처음 느끼는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순백색의 실내에 놓여있는 (자신이 앉아 있는) 독특한 의자입니다.


아르누보 시대의 대표적인 가구 디자이너 카를로 부가티의 'Throne Chair'입니다.

양피지, 에보나이즈드 우드, 청동 그리고 구리와 뼈가 인레이된 목재 등 제작 당시 가구를 위해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소재들만을 사용해서, 아르누보 양식으로 화려함과 우아함 그리고 존재감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에보나이즈드 우드는 나무에 뜨거운 쇠를 갖다 대서 생기는 화학적 변화로 인해 나무 표면을 진하게 변색시키는 방법입니다. 말로 하면 간단하지만, 전체 표면이 이질 감 없이 변색되게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거기에 구리와 상아와 같은 동물의 뼈들을 나무에 붙이는 것 역시 대단한 작업이죠. (우리가 패각을 붙여서 만들던 자개장을 상상해보면 될 듯합니다)

이렇듯 이 의자는 의자라는 가구가 가지고 있는 실용이라는 본연이 목적성과 상관없이 예술작품처럼 제작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의자가 가지고 있는 기호적인 의미는 creativity입니다.


그렇다면 웨이랜드가 창조한(create) 데이비드 역시 AI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목적과 기능에 충실하게 만들어진 (Made) 것은 아니었던 것일까요?


데이비드의 눈에 무엇인가가 계속 들어오며 대사가 이어집니다.


D : Piano. Stenway, concert grand.



의자를 지나 데이비드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음악에 관한 것입니다. 인간이 이루어낸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예술이 빠질 수는 없죠. 우선 음악부터 시작합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음악을 상징하는 기호는 바로 '슈타인웨이'에서 출시된 연주회용 그랜드 피아노입니다.

피아노 전문 블로거에 따르면 D-274 모델이라고 하며, 전 세계 유수의 연주회장에서 연주용으로 구비하고 있는 피아노입니다. 


사실 이 피아노 자체가 대단한 창조를 보여준다고 하는 것은 억지스럽습니다. 하지만 이 피아노를 통해서 진정한 창조가 시작되는 것이죠. 그래서 웨이랜드는 데이비드에게 연주를 시켜 보는데, 

데이비드는 바그너의  기념비적인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의 첫 편에 해당하는 <라인의 황금>에 나오는 "entry of the gods into valhalla" 의 모티브를 피아노로 연주합니다. 


이기적인 신들이 부귀와 영원한 젊음 등 소망하는 것들을 모두 소유하기 위해 자신들의 능력과 권력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오페라 속 음악이 나오는 장면은 영화에서 웨이랜드가 가지고 있는 숨겨진 욕망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신들은 거인족에게 발할라 성을 완성하게 하지만 그에 대한 보답으로 거인들에게 약속한 선물을 주지 않을 계략을 세우는 장면과 신들이 위대한 발할라로 입장하는 장면이 교차되며 위의 모티브가 연주됩니다)


데이비드가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프로메테우스>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엔지니어'가 우주선을 조작하기 위해 음악을 이용하는 장면이나, <에이리언:커버넌트>에서 또 다른 AI인 월터가 데이비드에게 음악을 배우는 장면에서 감독은  "음악적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창조의 능력이 있다는 것일까?"

라는 색다른 의문점을 던지고 있습니다. 


바둑이나 체스 같은 두뇌게임의 경우에 AI가 인간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과, 음악과 미술 같은 예술에 있어서 AI가 인간을 뛰어넘는 창의력을 갖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거대한 장벽이 존재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음악에 이어, 마지막으로 미술이 등장합니다.


D : The nativity, de Piero Della Francesca.



예수의 탄생을 의미하는 The nativity란 제목으로 그려진 초기 르네상스 화가 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작품입니다. 


인간을 창조한 것과 신의 탄생, 과연 창조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천지창조'와 '유전자의 진화' 그 사이에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리고 나서 웨이랜드의 심경이 점차 드러납니다.


W : You are my creation.


~ 중략


D : If you created me...

      who created you?


W : The question of the ages...

      Which I hope you and I will answer one day.


 W : All these wonders of art, design, human ingenuity...

        All utterly meaningless in the face of the only question that matters.

       Where do we come from?


그리고 이런 둘 사이의 대사를 통해, 영화의 대전제를 알리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창조라는 의미를 찾아나가는 미래의 신화에 관한 것이다"



AI에게 데이비드란 이름이 부여되는 과정도 의미심장합니다. 

What is your name?이라는 웨이랜드의 질문에, 데이비드는 방 한쪽을 주시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시선이 멈춰 선 곳에는 커다란 조각상이 놓여있는데, 바로 라파엘로의 <다비드>입니다.



AI 데이비드는 자신에게 주입된 기억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학습된 기억에 들어있는 정보를 통해 방안의 조각상이 데이비드라는 것을 알고서, 자신의 이름을 이 위대한 조각상의 주인공과 동일하게 만들어 버린 것일까요?


이렇듯 감독은 영화의 첫 장면부터 관객들에게 지적 도발을 주저 없이 감행하기 시작하는데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신이 아니라면, 누가 우리를 이렇게 뛰어나게 만들어 낼 수 있었단 말인가? 또는

하나의 작은 유기물이 자연의 우연을 통해 훌륭하게 진화해 낸 것일까? 와 같은 신과 과학 사이의 갈등에 대해 처음에 소개한  <무신론자의 시대>에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지금 신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마음이 불편한 사람도 많겠지만,

과학이 삶의 의미의 원천이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그에 못지않게 많다.

그러나 그 두 요소의 성격이 이렇게 서로 얽혀 있다는 사실은 대체로 간과되었다"


저에게 영화와 책의 교집합이 느껴지는 이유는, 감독이 이 책을 읽고 영화를 만들어서는 절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신과 과학 사이의 다양한 갈등이 벌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를 지나온 감독의 개인적 경험들과 <무신론자의 시대>라는 저서를 가로지르고 있는 저자의 학문적 경험치들이 시대의 특징에 따라 많은 공유점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프로메테우스>의 첫 장면에서도 연출되고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주인공인 엘리자베스 쇼의 어린 시절 회상 장면이 영화의 도입 부분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데이비드가 수면상태에 있는 엘리자베스 쇼의 기억을 몰래 들여다보는데요,


아빠와 함께 있던 어린 소녀는 죽은 시신을 옮기는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들은 어디로 가나? 그리고 왜 아빠는 저 사람들을 돕지 않나?"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고

아빠는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기에 그들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은 후에 가는 곳은 종교에 따라서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였죠.


그렇다면 우리는 동일한 인류가 아니었던가요? 종교에 따라서 서로 다른 별에서 지구로 옮겨온 서로 다른 종족들이었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왜 종교는 우리를 그렇게 갈라놓고 있는 것일까요?


소녀가 아빠한테 던진 "죽은 후에 가는 곳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에 아빠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곳 "아빠는 그렇게 믿는다"라고 부연 설명을 덧붙이는데, 종교는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결코 대답을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과학 역시 이 모든 것에 적합한 답을 찾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역시 의문들이 거듭될수록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두 요소의 성격이 상당히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두 AI인 데이비드와 월터 (파스벤더가 1인 2역을 하고 있는)는 각자의 행동과 대사들을 통해 서로 대립관계에 놓여있는 우리의 생각들을 비교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데이비드는 상당히 과격하게 새로운 진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근간에는 의외로 순수함과 진실성을 추구하고자 하며, 자신의 진보는 창조를 위한 것이라며 파괴를 일삼는 것에도 주저함이 없습니다. 이런 데이비드의 모습은 신이 죽었다며 파괴적인 창조를 주장하고 있던 근대 초기의 니체주의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창조와 디오니소스적인 자기 탐닉은 근대 초기 니체 사상에 영향을 받은 니체주의자들이 잘 보여주던 시도들이다 - 폴 비숍 <무신론자의 시대> 중에서)


월터는 이런 데이비드를 향해, 너의 창조적인 모습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며 좀 더 성숙한 느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런 월터의 발언은 우리가 처하고 있는 현대 교육 시스템의 문제들을 새삼 새롭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많은 시간 동안 "창의성" 교육을 이야기해 온 우리의 교육 현실은 하지만 실제 삶 속에서는 그와는 정반대로 창조적인 인간형들이 보여주는 행동 패턴을 다수의 우리들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 이해할 수 없음이 야기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들에게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사실입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이제 와서는 어느 정도의 추종자들을 거느린 일종의 종교처럼 느껴질 정도이지만, 초기에 그가 거듭한 많은 실패들은 다수의 대중이 그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지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천재인지 아닌지 또는 그가 옳고 그른지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단지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 팬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창의적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능력"이라고 되어 있으며 (표준국어대사전-네이버) 이를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면, 보편적인 또는 통속적인 생각 (기존 사회의 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사상 및 사고)와 다른 생각을 의미 할터이고, 사회 구성원들이 집단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상과 다른 사상 및 사고 체계는 기존 사회 구성원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의심과 두려움을 가져오는데, 두려움의 원천중의 하나가 '무지'에서 시작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다수의 대중에게는 항상 창의적인 사람들 또는 사상들은 이해하기 힘든 경계선 너머에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결국 창조에 관한 "신"과 "과학"과의 대립만큼이나, 믿고 싶지만 (행동의 방향성이 옳다고) 믿을만한 근거를 찾기 힘든 (머리와 마음이 가지고 있는 거리감만큼이나) 현재 사회에 존재하는 의문들일 테고, 감독은 이렇듯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선입견에 끊임없이 스크래치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보여줍니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문제들에 관해서 인간 사회가 제시하고 있는 다수의 방안들 중에 하나가 

바로 예술인 것 같습니다.


첫째로 믿음에 대한 본질이 개개인의 정서적인 또는 심리적인 안정이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예술이, 음악과 미술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심리적 또는 정서적 안정에 많은 도움을 준다는 점이 '신'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있어서 중요한 대체재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신론자의 시대>에서도 이에 대한 많은 예시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에이리언:커버넌트>에서는 데이비드가 월터에게 피리를 부는 법을 가르치는 장면을 통해 관객들에게 음악이라는 예술이 지니고 있는 가치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끔 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종교나 과학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한 극복 과정으로 예술이 사용되는 부분입니다. 많은 예술가나 사상가들은 언어(또는 과학)로 해결할 수 없는 우리의 사고체계 속의 모호한 지점을 예술이 설명해 낼 수 있으리라 보고 있습니다. 

"I found I could say things with colour and shapes that I couldn't say any other way - things I had no words for." 

조지아 오키프의 언급과 같이, 많은 예술가들은 평균적인 우리들보다 뛰어난 그들의 감각을 통해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많은 것들을 색과 형태 또는 소리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으며,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우리는 교육체계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넘는 지적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에서도 이런 관점에 관한 장면이 등장하고 있는데 바로 '엔지니어'들이 우주를 이해하는 언어로 과학이나 수학적 체계가 아닌 음악을 사용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에이리언>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프로메테우스>와 <커버넌트>는 사실 기존 시리즈의 광팬이라면 즐거움보다는 실망이 더 클 영화들인 것 같습니다. 제임스 카메론과 데이비드 핀쳐(영화 <세븐>) 그리고 프랑스 감독인 쟝피에르 쥬네(영화 <델리카트슨 사람들><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로 넘어가며 엄청난 비주얼과 스토리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1~4편까지의 시리즈들을 총 결산해서 <에이리언> 시리즈의 레거시를 완성해 나가는 전편을  만들어 낼 생각은 애당초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전 시리즈에 상관없이 영화계의 거장 감독이 던지는 새로운 시대가 가져야 할 지향점에 대해서 한 번쯤 고민해 볼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팬에게는 아주 재미있는 두 편의 영화가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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