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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Jun 21. 2020

여름, <슈퍼내추럴>의 계절

칼 마리아 폰 베버, 카스파르 데이비드 프리드리히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목까지 차오르기 시작하는 계절이 돌아오면, 왠지 모르게 어둡고 서늘한 밤을 꿈꾸기 시작합니다. 내려쬐는 햇살의 강도와 길이가 커지고 길어질수록, 암흑에 대한 갈망 역시 그에 비례해서 커져만 가는데....


빛이 사라져 버린 밤의 시간을 지배하는 것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아마도 흥미진진하게 우리의 귀를 잡아끄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별빛이 찰랑거리는 밤을 수놓을 순수하고 서정적인 그래서 아름답게 느껴지는 시와 같은 것들도 있겠지만,

우리의 비틀어진 욕망은 항상 어둡고 깊은 곳에서 그 울림이 더 커지는 법이다 보니, 한 낯의 더위를 식혀주는 오싹하고 괴기스러운 이야기들이야 말로, 이 칡흑의 밤을 갈망하게 만드는 더운 여름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계절 메뉴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많은 공포와 괴기를 다루는 이야기들 중에 가장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흡혈귀, 뱀파이어를 소재로 한 고딕스러운 영화들 아닐까요?


 흡혈 박쥐에서 그 모티브가 시작된 때문인지 검은색 패션과 어두운 배경, 반짝이는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피를 향한 갈증을 암시하는 Red-eye로 특징지어지는 대표적 이미지는 여름밤의 열기를 식혀줄 이야기의 좋은 소재로 충분해 보입니다.


현대적으로 각색되어서 청춘 로맨스로 포장된 <트와일라잇> 이라든지 



반은 인간 반은 흡혈귀인 독특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블레이드> 같은 할리우드 히트 영화가 대표적이죠.



미국 대중문화에 이런 고딕 이미지가 사용되기 시작된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미국 문화사에서 최초의 뮤지컬로 여겨지는 (물론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다고는 하나) 중요한 작품인 <The Black Crook>도 파우스트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 로만틱 멜로드라마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초연 당시 프로그램


그런데 이 <The Black Crook>이 탄생하는 데에 독일 낭만주의 시대의 유명한 오페라 작품 하나가 중요한 롤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칼 마리아 폰 베버의 <Der Freischütz-마탄의 사수>입니다.


(2막 늑대의 골짜기 무대 디자인 스케치)



1821년 6월 18일 독일 베를린에서 초연된 이래, 작곡가의 예상을 뒤엎을 아주 대성공을 거둔 이 오페라도 기본적으로 파우스트적인 선과 악이 대결하는 스토리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을 위해 영주가 주최하는 사격 대회에서 우승을 해야만 하는 주인공 막스. 평상시에는 꽤 명사수인데 막상 대회를 앞두고 벌어진  사격 대결에서 부진한 결과를 받아 들고 고민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유혹!!


 무엇이든지 맞출 수 있는 마법의 탄환이 있다며 접근하는 카스파르의 유혹에 빠져 자신의 영혼과 마법의 탄환을 바꾸게 되는데, 여기에 숨겨진 함정은 다름 아닌 악마가 건네주는 7발의 마법의 탄환 중 6발은 사수가 원하는 것을 백발백중으로 맞추지만 마지막 한 발은 악마가 원하는 목표물을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막스를 꼬셔 유혹에 빠지게 한 카스파르는 이미 악마와 계약을 하고 있던 상태로, 악마에게 새로운 희생양을 넘겨버리고 자신의 영혼을 구원받고, 자신이 흠모한 아가테가 막스를 선택한 것에 복수를 하고자 하는 생각에 빠져있습니다. 


오페라의 스토리는 이 문제들을 종교적 신비주의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데, 


 착한 마음을 가진 아가테가 은둔자(수도자)로 부터 받은 하얀 장미가 마술에 걸린 마지막 한 발의 방향을 아가테에서 카스파르 쪽으로 바꾸어 버리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결국 약간의 우여곡절 끝에 마을 사람들의 축복 속에 두 남녀의 사랑과 소망이 이루어지는 쪽으로 훈훈하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_o-hIEia5I 


유명한 이 <마탄의 사수> 오페라 서곡은 그 주요 선율을 차용해서 만들어진 인기 찬송가 덕에 '어 나 이 노래 아는데' 하는 분들도 많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사냥꾼의 뿔피리를 연상케 하는 경쾌한 혼의 선율로 시작되는 "Was gleicht wohl auf Erden dem Jägervergnügen?" (사냥꾼의 합창) 도 이 오페라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곡이죠.


하지만 뭔가 선율의 느낌이 푸른 초원 위에 개들이 뛰어다니고 멋진 복장을 한 채 말위에서 여우를 쫓고 있는 영국의 사냥터와는 그 결이 많이 다릅니다. 독일의 짙고 검은 숲의 으스스함이 풍겨져 나오고 있네요.


이렇듯 유혹에 빠진 사랑하는 사람을 순결한 여성의 선한 마음을 통해 구원으로 이끌어 간다는 전형적인 선과 악의 대립 구조에 바탕을 둔 종교적인 오페라의 내러티브가 신교의 영향력이 컸던 당시 독일 관객들의 종교적 감성을 지배했다면, 동시에 고딕스러운 분위기와 소재들 ( 흔히 supernatural이라고 부르는 괴기스럽고 자극적인 요소들)은 그들의 세속적인 호기심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 꿈의 해석이  중요하게 등장하는데, 이런 민속적이고 신비스러운 요소 역시 당시 관객들의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뭔가 석연치 않은 꿈을 꾼 아가테가 막스를 생각하며 기도를 하는

3막에 나오는 아가테의 카바티나 "구름은 하늘을 가려도"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AaGJgiqPLU


깨끗하고 맑게 울려 퍼지는 군둘라 야노비츠의 목소리가 순결한 아가테의 기도를 잘 표현하고 있죠. 




당시 독일의 관객들이 <마탄의 사수>에서 풍겨져 나오는 것과 같은 초자연적인 이미지를  좋아하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이 독일 낭만주의 대표 작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이들 알고 계신  Caspar david friedrich인데요,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1818 Oil on Canvas, 94.8 cm × 74.8 cm


작가의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 작품이죠. 국내에서는 몇 년 전 홍대 미대 면접시험에 등장하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습니다.


그림에 관해서는 다양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비평가의 해석에  주요 포인트가 되는 요소들은 산 정상에 당당한 자세로 서있는 주인공의 모습, 그리고 발아래 펼쳐진 안개 위로 저 멀리 보이는 산의 형상,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그래서 주인공의 정체성에 대한 다양한 추측이 가능한 점 등이 많이 거론되고 있는데, 


저에게 가장 눈에 띄는 이 그림의 특이한 지점은 바로 정산에 오른 주인공의 옷차림입니다.


그림 속 캐릭터가 입고 있는 패션 스타일이, 저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이유는 한눈에 보기에도 산 정상에 오르기에 적합하지 않은 세련된 정장 차림이기 때문인데요

그림 속에서 묘사된 산의 형태가  바위가 울퉁불퉁 튀어나와 있는 아주 오르기 힘든 구조인데, 어떻게 저렇게 잘 차려입은 모습으로 산 정상에 올라설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죠.


이런 모습을 통해 생각해 보면, 당시 사람들이 산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했는가를 우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등산의 경험이 많지 않았기에, 이런 복장으로 산 정상에 서있는 그림의 리얼리티에 대한 거부감이 많지 않았을 테죠.


그리고 두 번째는 ( 이 지점에서 낭만주의의 면모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특히 독일의) 산에 대한 관점이 극적으로 바뀌며, 산의 정상에 선다는 이미지가 당시의 사회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냈구나 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상에 선 남성, 마치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뭔가 신의 영역에 접근하고 있는 듯한 자신감과 자만심

그리고 성공과 용기 등에 대한 새로운  상징 등


이렇듯 당당하고 멋진 모습으로 정상에 올라 거센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로 저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점차 사람들의 관심이 그때까지 미지로 남아 있던 신비로운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가 아닐까요?


그렇게 바꾼 패러다임으로 인해 산의 정상에 서있는 모습은 누군가에게는 올라가야 할(정복하거나 쟁취해야 하는 ) 새로운 목표에 대한 상징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람들을 홀릴 수 있는 좋은 이야기의 원천이 되기 시작하기도 하는 것이죠.


 

Chalk Cliffs on Rügen, 1818 Oil on canvas,  90.5 cm × 71 cm


첫 번째 그림에서 방랑자가 세상을 굽어 내려보는 장면이 마치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보탄이 방랑자의 모습으로 세상을 돌아다니는 듯한 이미지가 연상되는 아주 남성적인 광경이라면 


이 두 번째 그림에서 보이는 이미지는 사랑하는 남녀가 가이드와 함께 풍광을 보기 위해 산을 올라서 드디어 장관이 펼쳐진 곳에 도착한 그 시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멋진 장관이겠지만 동시에 발아래 펼쳐진 낭떠러지의 모습에서 아찔함을 느끼고 있는 듯한 여성이 조심 스래 한 손으로 작은 나무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사랑하는 (?) 남성에게 조심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모자가 날아갈까 봐 걱정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여기까지 오르느라 머리에 땀이 차서 인지 한쪽에 모자와 지팡이를 내려놓고 조심스레 끝으로 다가가는 남자의 모습은 첫 번째 그림에서 바위에서 당당하게 서있던 남성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그리고 이 나무의 모습에서 조금씩 우리가 고딕스럽다고 느끼게 되는 Caspar특유의 이미지가 발견되는데요



마치 유령의 팔처럼 흐느적거리는 느낌으로 길게 뻗고 있는 나뭇가지들은 어딘지 모르게 음산하고  불안감을 자아냅니다. 


아래의 그림처럼 폐허가 된 고딕 성당의 잔재를 둘러싼 나무들의 이미지는 완벽한 "유령의 집"에 대한 전형이 아닐까요?


.

이런 이미지들은 고딕스러운 이미지를 추구하는 팀 버튼 같은 감독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영화 <슬리피 할로우>의 한 장면

 

이 영화 이외에도 <비틀 주스> 나 <크리스마스의 악몽> 같은 팀 버튼이 감독한 영화들을 보면 카스파르 데이비드 프리드리히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장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딕이라는 단어의 시작은 중세 프랑스 건축에 대해서  르네상스 시대의 이태리가 보이는 무시하는 태도에서 비롯되었지만 현대의 대중문화 속에서는 이렇듯 오히려 독일 낭만주의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감성을 고딕이라는 단어로 해석하고 있는 현상을 쉽게 만나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마탄의 사수>가 처음 세상에 선보인 지금부터 약 200년 전 6월의 독일도 지금처럼 많이 더웠을까요?

오랜만에 다시 듣게 된 베버의 음악이 6월의 더위로 힘들어하는 우리들에게 시원한 선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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