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와 패션
'도마뱀을 위한 신발을 만들던 소년' 이 사람의 광팬이시라면 아마 소제목의 문구만으로 이미 눈치를 채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네, 맞습니다. 마돈나가 자신의 전기를 집필할 작가에게 한 말입니다. '섹스보다도 좋은 구두' 바로 마놀로 블라닉입니다. 한 때 최고의 섹스 심벌로 이름을 날렸던 마돈나의 말이니 더욱더 화제가 되었었던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저는 이 예쁜 구두를 디자인하는 디자이너가 당연히 '여성'일 거라고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세히 눈여겨보지 않은 탓에 그저 예쁜 구두라고만 생각했었거든요.
여성 신발에 관심이 많을 이유가 없던 평범한 남자에게 마놀로 블라닉을 알게 해 준 건, 중년 이상의 마놀로 블라닉 팬이라면 아마도 아시겠지만, 그 유명한 드라마 'sex and the city'의 주인공 캐리의 엄청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sex and the city' 스스로가 남과 여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던 '경계를 넘어버린' 드라마 이기도 했습니다.
마놀로 블라닉의 디자인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정말 독특했었는데, 저는 어떤 디자이너길래 이토록 매력적인 구두 이미지를 보여 주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구두를 신은 여자에 대한 관심보다 구두 자체에 대한 관심이 더 생기게 하는 디자인의 덕후스러움은 덕후의 눈에 잘 보이는 법이니까요.
이후 많은 매체의 기사와 인터뷰들을 통해 보면서 이 디자이너의 덕후 기질에 대해 하나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계기가 생깁니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가 하는 말과 행동처럼 좋은 자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의 기사는 마놀로 블라닉이 데이비드 호크니에 대해서 언급한 내용인데요, 이 글은 2017년 2월 Vogue UK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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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ckney had something else, which was fantasy. I’d never seen such freedom and novelty and freshness in England. I was mad about the costumes and sets he designed for The Magic Flute at Glyndebourne in the late Seven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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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ake’s Progress was wonderful, too. The sets were cross-hatched in green and red, with a beautiful temple and beautiful trees – even the fringes of the curtains were wonder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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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니가 무대디자인을 맡았던 영국 글라인드본 오페라 하우스의 공연에 관한 이야기를 인터뷰를 통해 밝히면서 자신의 디자인 세계에 호크니가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데이비드 호크니에 대한 이해가 마놀라 블라닉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열쇠가 될 것 같습니다.
그는 데이비드 호크니 그림 속에는 "Fantasy"가 들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판타지라는 단어에서 패티쉬가 연상되곤 합니다. 북아프리카의 '매력'이라는 단어에서 그 어원이 왔다고 하는 이 프랑스 말은 현재 성적인 의미를 주로 암시하고 있는데, 저는 모든 성적인 매력의 중심에는 판타지가 늘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데이비드 호크니의 많은 작품은 동성애자인 그의 본성으로 인해 남성 간의 성적인 긴장감이 많이 함축되어 있는데, 마놀로는 이것을 '판타지'로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상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두 남자가 등장한 무미건조한 평면적 풍경이 상상력이 발휘되는 순간 우리의 몸을 팽팽하게 죄여 줄 '에로티시즘'과 무한의 동경을 유발해 내는 궁극의 '럭셔리함'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 속 아닐까요?
그렇다면 여성의 신발 디자인에 어떠한 판타지 즉 '발에 대한 페티시'를 예술에 함축되어 있을 법한 아주 우아하고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포함시킬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상상도 가능합니다.
마놀로는 인터뷰에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언급하며, "Freedom" 그리고 "Novelty"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모차르트를 좋아하신 다면 익숙하실 'Freedom'이란 단어는 마술피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상용적인 어구입니다. 프리메이슨이란 단어를 모차르트와 연결시키고 싶은 많은 비평가들한테 마술피리만큼 좋은 선택지는 없을 테니까요.
( 인터뷰에서 언급된 1978년 글라인드본 축제 실황 음반 )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범주에서 'Novelty'라는 표현은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마놀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데이비드 호크니가 연출한 이 1978년 마술피리 무대의 독특함에 있습니다.
일반적인 마술피리 연출보다 훨씬 정적이고 큰 스케일로 무대를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 점에 관해서는 78년이란 시대적 흐름이 현대의 연출 기법과는 많이 틀릴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호크니의 성향이 많이 들어 간 무대라고 생각됩니다.) 그 당시의 보편적인 연출인 단순히 노래를 부르기 위해 편한 동선, 화려한 볼거리를 주는 무대 등과 차별화되는 호크니가 보여주는 무대의 특징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우선 그에 대한 설명에 앞서 이해를 돕기 위해 이런 장면을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동영상을 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멈춤을 누르면, 우리는 작은 찰나의 시간이 포착된 한 장의 스틸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위의 가정을 잘 기억해 두고 다시 오페라로 돌아가서, 편안하게 공연을 관람하고 있는 우리를 상상해 볼까요. 막이 오르고 음악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뭔가 색다른 느낌이 나기 시작합니다. '이게 뭐지, 내가 보던 마술피리와 많이 다른데' 그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흐릅니다. 모든 시간이 정지된 느낌이 들며, 무대 전체 사이즈가 된 멋진 호크니의 작품 하나가 눈 앞에 펼쳐집니다.
잘 표현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호크니가 시도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공연의 매 순간들이 플레이어에서 멈춤 버튼을 누른 순간 생성되는 이미지인 것처럼 보이게끔 아주 정적으로 마치 자신의 그림을 한점 한점 연결해 보여주는 것처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호크니는 대상이 되는 풍경을 자신만의 이미지로 재 해석해 내는 re-picturing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로서, 오페라의 매 장면을 그런 정지 장면의 순간들을 포착해 낸 이미지로 표현해 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런 숨겨진 의도는 사실 녹화된 동영상을 통해서는 느끼기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전체의 이미지보다는 부부적인 것에 중심을 두게 되는 오페라의 동영상 특징 때문입니다.
사실, 마놀로의 인터뷰 때문에 다시 보게 되지 않았더라면, 저는 평생 동안 호크니가 무대 연출에서도 위대함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 실제로 이런 유사한 경험은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1996년 Peter Stein이 연출한 웨일스 국립 오페라단의 드뷔시의 '펠리아스와 멜리장드'입니다. 당시 놀라운 충격으로 전 유럽을 휩쓸었던 이 공연을 운 좋게 버밍엄에서 실황을 본 후, 출시된 오페라 비디오를 사서 주변 지인들에게 소개했지만, 제가 본 현장의 느낌을 비디오를 통해서 알리기는 역 부족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 마술피리를 보실 때, 전체 무대 장면이 나오는 매 순간순간 멈춤을 시도해보세요.
그리고 그 장면들을 호크니의 기존 작품들과 비교해서 생각해 보시면, 모든 오브제 사이의 공간과 색의 균형 그리고 호크니의 대표적 특징인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 내는 효과를 충분히 느끼실 수 있습니다.
건축을 전공한 디자이너의 배경 덕분에 마놀로는 스스로 많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한 신발 디자인의 특징을 묻는 질문에 'Balance 균형과 symmetry 대칭'을 많이 언급합니다. (위의 신발 사진은 그 콘셉트를 잘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균형과 대칭은 오랜 유럽 미술과 건축의 전통 중 하나이며, 호크니의 작품에서도 잘 표현되어 있는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마놀릭은 이 역사적인 공연을 보면서, 마술피리와 호크니 같은 위대한 작품들이 서로의 전통 하에서 어떻게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며, 본인 또한 새로운 것의 창조에 기존의 전통에서 많은 영감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돌려서 하기 위해, Novelty란 단어를 고른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트라빈스키의 rake's progress(우리말로 난봉꾼의 행각이라고 흔히 변역 되는)는 영국의 William Hogarth의 동명 그림 및 판화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작품입니다.
한데 재미있는 것이 바로 이 William Hogarth란 영국 작가의 작품을 오마주한 데이비드 호크니 작품이 있습니다. 제목은 동일한 rake's progress입니다.
여기서 또 마놀로의 뛰어난 풍자가적 기절이 나옵니다. 그는 무대를 언급하며 cross-hatched란 표현을 썼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cross-hatched란 미술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미술가가 만든 무대를 암시하기도 했을 테고, 오페라의 원형이 미술작품에서 나왔다는 얘기도 하고 싶었던 걸까요?
위에서 보여드린 william hogarth의 작품에는 시대적인 특징상 이런 표현 기법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호크니의 무대 디자인 역시 위의 이미지를 통해 확인되는 것처럼, 커다란 상징으로 모든 부분에 (의상, 무대 세트) cross-hatched를 보여주고 있고, 그 상징에서 오페라 자체와 호크니 동명작품의 원형이 되는 그 관계에 대해서도 cross 되어 있다고 암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마놀로의 인터뷰에서 아주 재미있는 '기호'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이런 엄청난 식탐(스페인 사람이니 이태리 사람 못지않을 것 같은)을 문화 전반에 걸쳐 느끼는 진정한 덕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트, 클래식 음악에서 그가 나고 자랐던 아프리카의 색채가 강한 카나리 제도의 자연, 거기에 건축을 공부한 학문적 배경과 심지어 포르노 스타에서 까지 영감을 얻고 있는 이 호기심 넘치는 디자이너의 끝없는 덕후스러움은 서로 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과거에서 현재를 연결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디자인의 지평을 열고 있는 창의력의 원동임을 유감없이 증명해 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