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루이스 글룩의 시 < A Fantasy>의 4연을 떠올리며 그녀와 같은 성을 가진 오페라 작곡가 크리스토프 글룩의 작품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중 3막에 나오는 아리아 "Che faro Senza"를 카운터테너와 바리톤의 목소리로 비교해서 들어보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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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한참 듣다 보니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중에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신랑 측에게 보내야 하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그녀의 엄마인 백작부인에게 고용된 화가 마리안느,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는, 누구의 아내이자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야 하는 현실 앞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엘로이즈, 그리고 백작부인의 집에서 가사를 담당하고 있는 순진하고 감정에 충실한 소피 이렇게 세 명의 여인들은 어느 날 밤 함께 그리스 비극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읽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지만 신들의 도움으로 사랑을 되찾기 위해 지하세계 하데스로 들어간 오르페우스가 드디어 에우리디케와 함께 지상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데, 그러다가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며 영원히 이별을 하게 되는 절정에 다다르는 순간, 세 명의 여인은 극명하게 차이나는 해석을 보여줍니다.
순진한 소피는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왜 돌아보냐며 사회적 규범이 만들어낸 도덕이라는 체계에 순종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중성적이며 은연중에 지배적인 입장을 드러내는 마리안느는 사랑하는 여인과의 추억을 선택했다며 오르페우스가 연인이 아닌 시인의 면모를 보여준다고 뭔가 철학적이고 그럴싸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마리안느의 이런 모습에선 왠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지도층 특히나 자신들이 여타 구성원보다 사고의 우월함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는 지배계층의 현학적인 태도가 엿보입니다.
영화 초반부에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대상인 엘로이즈를 바라보던 마리안느의 얼굴에서는 이런 이성적이고 약간은 무감정인 표정을 드러내고 있죠.
마지막으로 엘로이즈가 자신의 감정과 느낌에 충실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아마도 에우리디케 그녀가 오르페우스에게 뒤돌아 보라고 했을지도 몰라"
엘로이즈는 자신을 그리는 마리안느에게 당신만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고, 당신이 나를 그리는 동안 나도 당신을 바라본다고 말하는 당당한 모습을 보였던 것처럼, 신화의 한 장면을 관습적인 보편적 시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선으로 해석해 내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이 순간이 오기 전까지 대부분의 관객들은 당연하게 마리안느의 눈을 따라 초상화의 모델이 되고 있는 엘로이즈를 들여다보며, 이제껏 우리가 익숙하게 그리고 관습적으로 받아들여 왔던 평등하지 않은 위계질서하의 인간관계를 구성하는 시선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선택을 반드시 오르페우스 입장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에우리디케가 할 수 있다는 점도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영화는 이렇듯 남녀의 관계하에서 상하의 위계질서를 내포하고 있던 사랑이라는 관계를 여성들 간의 사이로 재구성함으로써, 진정하고 평등한 모습을 지닌 새로운 사랑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런 새로운 시선을 염두에 두며 글룩의 아름다운 아리아를 다시 들어보고 싶어 졌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8dIevs0VlU
필립 쟈로스키의 해석은 격정적이며 템포의 생동감이 뛰어납니다. 이런 오르페오에게는 왠지 소피와 같이 열정적이며 순수한 에우리디케가 잘 어울릴 듯 보입니다.
지난 글과는 달리 초판 악보에 충실하게 카운터 테너 버전으로 비교해 보려고 하는데요,
또 다른 뛰어난 카운터 테너 안드레아스 숄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UcXLzlmQjg
안드레아스 숄의 해석은 좀 더 차분하고 감정을 외부로 표출하지 않고 안으로 삭히고 있는 느낌입니다.
루이스 글룩의 시구가 다시 떠오르는데요,
이런 차분한 감수성을 지닌 오르페오라면 자신이 사랑한 에우리디케의 선택을 존중해 주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좀 더 엘로이즈와 같은 에우리디케에게 어울리는 오르페오의 노래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이 상황에 대한 미술가들의 시선이 궁금해져서 찾아 보니
Metmuseum에 소장되어 있는 로댕의 작품 <Orpheus and Eurydice>이 특히 눈에 들어 옵니다.
에우리디케가 잘 따라오는지 확신이 없는 뒤를 돌아보기 바로 전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는 로댕의 이 작품은 많은 남성들이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자세를 보이는 보편적인 상황에 대한 거대한 메타포로 보입니다.
같은 프랑스 출신의 여성 감독이 보여주는 사랑과 로댕이 생각하는 사랑 사이의 거대한 물리적 거리감이 느껴지네요.
이렇듯 사랑이라는 하나의 몸짓에 커다란 간극을 가진 두 개의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사랑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는 첫걸음이란 생각을 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