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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Feb 07. 2019

Hedwig,  Peter and   Oskar

Old  kids on the block

  

 

 작년 2019년 이 맘때쯤인 것 같습니다.

시사화 초대를 받아 샤밀란 감독의 새 영화 <글래스>보고 온 기억이 납니다.

고맙게도 넷플릭스에 다시 올라와서 작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 접한 <식스센스>에서 받은 충격으로 이후에도  샤밀란 감독의 영화는 꾸준히 챙겨보는 편 입니다.  샤밀란 감독은 평가의 호불호가 상당히 갈리는 감독인 것 같습니다.


 불호의 입장에서 감독을 비판하는 점은 대부분 영화 전개의 개연성 부족한 점과, 그리고 최초의 대박 작품인 <식스센스>의 반전에 비해 이후 영화들은 반전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반전"이라는 딱지를 붙여 레이블링을 해버린 후

그 선입견에 너무나 집착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좋아하는 편의 의견은 훨씬 다양한데, 저의 경우는 이 감독  반전이 있는 스릴러물 만을 잘 만드는 감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출신과 성장배경에서 기인한 차별화된 그의 시각이 독특해서 좋아하는 편입니다.

필라델피아라는 보수적인 미국의 대도시에서 인도계로 태어나 자란 샤밀란 감독은 이제는 유명인사로 주류 사회에서 견고한 자리를 잡고 있겠지만, 성장하는 동안 수 많은 차별과 괄시를 받았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는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그는 항상 주류와 다른 각도로 현상을 바라보는

그 만의  독특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서, 다양성을 좋아하는 제 취향에 그런 부분이 맞아 떨어진 것 같습니다.


 어마어마한 반전 탓에 묻혀버렸지만, <식스센스>에서 영화의 구조적 핵심은 살아있는 우리(기존의 체계, 법칙,  사고 방식)의 이 아닌 죽은 자(우리와 다른 소수의, 소외받는)의 시선(색다른 사고)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고,  이번 영화 <글래스>를 포함하는 3부작의 첫 번째 편인 <언브레이커블>도 hero를 원하는

약자이며 소수자(육체적으로 약하지만 정신적으로 악한 그래서 기존의 악한 분류법에 존재하지 않던)인 한 개인의 시선을 통해 히어로물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영화 <빌리지>에서는 공포라는 코드를 전체주의적 교육 시스템을 통해 전파시키며, 시스템적으로 약자를 지배하는 강자들(기존의 정치 및 사회 시스템)과 이렇게 만들어져 온 사회 체제 속에서 지배당하는 약자의 상황을 피지배자의 시선으로 보고 있습니다. (전체주의와 교조주의등을 한 작은 마을을 무대로 옮겨놓은 연극 같다고 해야 할까요)

<사인><해프닝>의 황당 무괴함도 결국은 사회의 주류 세력 (기존 제도권이 생각하는 외계인, 환경오염 등)과 다른 방식인 감독의 해석을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 보니, 기존의 영역에서 생각하는 전개의 개연성이나 이런 부분들이 상당히 약해진다는 비평이 당연한데요, 남미계 작가들에게서 주로 찾아볼 수 있는  'Magical Realism' 처럼,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계급주의적 개념에서 피지배자(약자)의 관점을 토대로 일반적인 개념의 논리적인 개연성과는 다른 상상력을 발휘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으며 ( 그들이 현실에서 꿈꾸는 것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오직 상상계와 현실계가 동일시 되는 새로운 세계관 아래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 이런 것을 비추어 볼 때, '감독이 논리적이지 않다' 보다는 '감독의 사고방식'이 남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아쉽게도 'split' (23 아이덴티티)는 보지 못하고, 곧바로 '언브레이커블'에서 '글래스'로 뛰어넘어 버렸는데, 어쨌건 글래스를 통해서도 23개의 분리된 인격을 알게 되는 데는 큰 문제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9살에서 멈춘 hedwig이란 자아가 23개의 분리된 인격속에  존재한다는 점 이었는데요 그는 왜 9살에서 멈추고 싶었던 걸까요?


대부분이 경우 빨리 자라서 어른이 되고싶은 것이 일반적인 아이들의 욕구가 아닐까요?

 아이들의 눈에 비치는 어른의 세계는 훨씬 많은 것을 약속하는 기회의 땅이 아니었나요?


자기들 하고 싶은 것을 맘데로 하고, 아이들의 행동에 대한 결정도 자기들이 내리고, 먹는 것 입는 것 모든 것을 자기들 마음대로 하면서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 이미지, 그런것이 아이들이 바라보는 어른의 세계 아닐까요? 


그런데도 주인공의 분리된 인격중 하나인 hedwig은 성장을 거부하고 유일하게 아이의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nFMS11g4fM


 

많은 영화평에서 이 부분을 fun요소로 읽어 내고 있기도 한데, 저는 무지( 無知)란 개념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형법상 형사 미성년자란 개념이 있습니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울 수 없다라고 보는 개념입니다. 다시 말하면 알고 있는 것이 없으니 (無知)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주인공 Kevin은 수 없이 들려오는 다양한(분리된) 자아가 내는 본인 내부의 소리에 혼란스러워합니다. 어느 정도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24번째 자아인 슈퍼 괴물인 '비스트'를 만들어 내려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서사의 논리적인 발전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요? 


성장이 멈추는 것은 외형만이 아니라 바로 정신적인 성장을 포함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9살의 머릿속에 슈퍼 괴물 '비스트'는 공포스러운 괴물일까요, 아니면 너무나 닮고 싶은 슈퍼 히어로일까요? 더군다나 케빈의 성장과정은 자신을 괴롭히는 외부세력(엄마)에게 맞설 슈퍼 히어로가 필요했었음을 암시하는데, 논리적인 방법으로는 엄마의 폭력에 맞설 슈퍼 괴물을 만들어 내기 힘들다고 생각했다면 샤밀란 감독에게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도덕이나, 선함도 결국 교육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어떤 죄 (제도권이 만들어낸 개념상의)에도 자유로울 자아를 설정할 필요성이 대두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렇듯 성장을 멈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버린 자신의 친구들과는 상당히 다른 관점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세상의 많은 것들을 바라보게 될것이며, 그들이 보는 시선은 진부하거나 틀에박힌, 제도에 의해 학습된 보편적인 우리들의 시선과는 많이 다를 것이란 확신이 드네요.


 이렇게 성장을 멈춘 자아를 등장시키는 것은 아주 재미있는 설정이었던것 같은데, 이런 상황이 등장하는

다른 작품을 생각해 보니, 재미있는 두개의 소설이 떠오릅니다.

바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화같은 '피터와 웬디' 와 아주 사변적인 소설  '양철북'이 바로 그런 작품입니다.

소설의 성격 차이만큼이나 주인공들의 성격도 극단적인 차이를 드러냅니다.


 


 '피터'는 그야말로 철없는 아이이고 도덕적인 자각이 거의 없습니다. 웬디(교육을 받아 기성 세력의 도덕관념을 가지고 있는)의 눈에는 너무도 철없고 윤리적으로 잘못된 일도 스스럼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헤드윅과 비슷한 무지한 어린아이입니다. 하지만 모르고(행동 및 도덕 규범에 대한 무지) 하는 행동이기에  우리는 피터팬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를 비난하기 보다는 오히려 귀엽고 재미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양철북'의 '오스카'는 대부분의 어른보다 더 어른스럽습니다. 교육을 받고 사고를 할 능력을 갖추고 있고 또 이런 것을 통해 지켜야 할 행동의 규범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는 성인들이, '왜 알면서도 다르게 행동하는 가'에 대한 의문이 바로 성장을 멈추었던 '오스카'의 본질입니다. 즉 '오스카'는 모든 걸 알고 행동하는 '애 어른' 인 것입니다. 여기서의 성장을 멈춘 아이는 인간이 가진 문제들에 대한 작가의 질문에 해당합니다. 국가란 무엇이고, 민족이란 무엇인가? 전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윤리와 규범이라는 것은 왜 만들어졌고 왜 지켜야 하나? 그런데 왜 우리는 그것을 지키지 않고 무시하고 있나? 등등 다양한 현실 사회 속에서 인간(모든 것을 알고 있는 성장한 성인)이 직면한 문제에 대한 질문을 하기  위한 작가가 고안한 장치이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양철북 영화 역시 상당히 완성도가 높은데요, 책과는 일부 내용이 다르기는 하지만 영상을 통해서 비틀어진 인간 사회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장면으로는 말의 머리를 바다에 집어넣어서 뱀장어를 잡는 씬과 오스카가 아버지의 정부이면서 집안일을 하는 가정부이자 본인을 돌보는 유모의 역할을 하는 마리아를 통해 성에 눈을 뜨는 씬등은 특히나 충격적입니다. 책을 읽지 않더라도 잘 만들어진 이 영화를 통해 귄터 그라스의 명작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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