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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iden Sep 05. 2024

무슨 차 좋아해? 크면 아빠한테 사주려고

돈 많이 들 텐데... 넣어둬유 이사장

자주 가는 곳, 익숙한 곳에서는 그 장소에 얽매인 기억들이 불현듯 노크하곤 한다. 그리고 일상이 얽매인 눈 익은 장소에서는 당연히 회사에 다니면서 치열하게 살아온 하루하루가 나를 당황케 하곤 한다.

'그때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러면 더 좋은 성과가 나지 않았을까? 왜 당시에는 이런 판단을 하지 못했나, 너무 일만 하면서 부하직원을 힘들게 했었지' 그런 때늦은 기억과 후회들. 나에게 이런 건 고문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이따금씩 이런 과거의 후회들이 밀려오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지며 어지럼증이 찾아온다. 이제와서는 되돌릴 수도 없는 자잘한 실수와 미련들은 이렇게 내 정신을 갉아먹는다.

그래서 때로는 잠시 생각을 비우고 뇌를 내려놓을 시간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이게 막상 늘 생활하던 공간 가운데에서는 쉽게 이뤄지지 못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나 보다.


여행길에 운전하며 늘 듣던 락 음악이 아닌 부드러운 재즈를 틀어놓으면 마치 배경음악이 바뀌며 새로운 경험의 스테이지에 들어간 것처럼 내 머리는 새로움을 받아들일 준비를 위해 고민들을 밀어두기 시작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멀리 떠나는 여행은 기회를 잡기 어려운 법, 무엇보다 돈이 들고 시간이 많이 드니까. 지금 나에게는 돈도 부족하고, 딸아이의 등하교 시간 사이에 잠시의 일탈을 꿈꿔야 했기에 시간도 부족했다.

그래서 근교에 낯선 카페를 무작정 찾아 떠났다. 가급적 집 주변에서 가볼 수 없는, 프랜차이즈가 아니면서 새로운 공간감을 위해 규모가 큰 카페를 찾아낸다.


높은 천장은 뻥 뚫린 하늘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


이곳에는 와이프와 작은 룰을 가지고 함께 동행한다. 일상, 구체적으로는 회사에 관련된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기로 말이다.

그러다 보면 생각보다 우리의 상상력이 빈곤하다는 걸 깨닫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회사를 제외하고 나면 우리에겐 딸아이가 가장 큰 존재이기 때문인 건지 곧잘 대화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지게 된다.


어제는 학교에서 오자마자 딸아이가 내게 안기며 이런 이야기를 했더랬다. 틀어놓은 티비에서 자동차 광고가 나오는 걸 보고는 이어진 작은 에피소드.


"아빠 저 차 좋아요?"

"음, 아빠 취향은 아닌데"

"그럼 무슨 차 좋아해? 크면 아빠한테 사주려고, 아니면 아빠가 죽으면 내가 탈 거야"

"돈 많이 들 텐데..."


얼마 전, 늙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안 뒤에 아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펑펑 울다가 이제는 어느 정도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덤덤하게 말하는 걸 보면.


캠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팔아버린 예전 차 양갱이


나는 딸아이가 내 취향의 스포츠 세단을 몰고 달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웃음을 흘렸다.

돈 이야기를 하면 아이는 곧잘 쥐꼬리만 한 용돈을 넣어둔 통장을 써도 된다고 대꾸하곤 하지만 마음이 고마워 애써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한다.


"넣어둬유 이사장 크큭, 코 묻은 돈을 내 어찌 건들겠수"


이런 어제의 작은 일화를 와이프와 나누면서 오늘을 벗겨내고 머릿속에서 회사를 지워냈다.


"근데 그거 알아 부엉이?(우리 부부간의 애칭)"


호기심이 동한 와이프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어제 아이가 나한테는 자기랑 마음이 딱딱 맞아서 좋고, 당신은 마음이 착해서 좋대. 급이 다르다 이거지"


요즘 아이는 아빠가 정말 좋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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