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칠십 살 김순남 Jun 03. 2022

벚꽃 잎 휘날리며


저만치서 성큼성큼 군복을 입은 청년이 걸어온다. 멀리서 보기에도 훈남이다. 걸음걸이가 당당하다. 나이가 먹어도 젊고 잘생긴 사람은 언제나 좋다. 아무도 없는 아름다운 거리에 활기차게 걸어오는 모습에 살짝 설레기까지 한다.      


’아!! 오 일병님!!‘      


심장이 멎는 듯하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딱 멈춰졌다. 그가 날 보고 걸어온다. 아. 그는 그대로다. 순간, 고개를 숙여 내 몰골을 본다.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그럼에도 내 눈은 나를 바라보며 다가오는 그에게서 한 시를 뗄 수가 없다. 가슴이 터져나갈 것만 같다. 내 앞을 지나칠 때 그는 힘차게 팔을 들어 이마에 대었다가 뗀다. 얼굴에는 함박웃음을 띄고 한쪽 눈을 찡긋했다.      


순간, 어느 따뜻했던 봄날, 벚꽃 잎 휘날리며 불던 봄바람이 그를 따라와, 내 스커트를 나풀거리게 했던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얕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그날의 벚꽃 잎을 그대로 날리며 나를 스치고 지나가 버린다. 쿵쿵거리던 가슴이, 그리움과 서러움으로 내려앉는다. 내 청춘이 그의 뒤를 따라 저만치 가다가 정신 차리고 다시 돌아온다.      


’할매야,!! 정신 차려야 돼!!‘     


스무 살쯤이었다. 이웃 아줌마가 알아봐 준 군 병원에 보조간호사로 잠시 몸담고 있었을 때였다. 그는 팔이 부러져 들어왔다. 팔에 깁스를 했다. 육 개월 정도 입원해 있었다. 나는 보조간호사라 어느 병동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주일마다 돌아가면서 다른 병동을 맡았다. 그는 바뀐 병동을 찾아서 내 주위에서 어슬렁거렸다. 잘 생기고 순한 얼굴에 말이 없었다. 나는 그의 행동에 그냥 웃어주기만 했을 뿐이다. 그가 병원을 나가는 날, 한참을 내 주위를 맴돌다가 겨우 말할 틈을 내어, 퇴원하고 군에 복귀한다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두어 달쯤 지나서 함께 지냈던 병실 친구들을 만나러 왔다. 월남에 간다면서 큰 소리로 인사를 나눴다. 나에게 들리라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내가 그에게 뭐라 할 말은 없었다.     


그는 쉬이 돌아가지 않고, 병원 복도에 서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나에게는 한마디 말도 못 하고 눈이 마주치면 웃기만 할 뿐이다. 그가 돌아간 후 후회가 되었다. 말이라도 붙여줄걸. 그리고 또 한 달쯤 지났던 것 같다. 낮 순번을 마치고 노곤한 몸으로 퇴근하는 길이었다.      


가로수에 늘어진 벚꽃 나무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봄이었다. 바람이 불면 벚꽃들이 눈처럼 휘날리던 때였다. 저만치서 빙긋 수줍은 미소를 띠며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힘차게 경례를 부친다. 월남에 가면 편지 보내고 싶다며 주소를 적어달라 했다. 두어 달 후쯤, 그에게서 첫 편지가 왔다. 나도 답장을 보냈다. 그사이 나는 언니를 따라 지방으로 내려가 있었다. 편지는 날 따라왔다. 일주일에 한 번씩 왔다. 탱크 위에 앉아서 전우들과 쉬고 있는 사진도 보내왔다. 갈수록 글이 애틋했다. 일 년쯤 지날 무렵, 한국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길로 소식이 끊겼다. 귀국하고 여러 가지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생각했다.      

오래 편지가 안 왔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마음 붙이고 노느라 나를 잊었나 보다 했다. 자주 만났던 시간은 없었지만, 그동안 주고받은 애틋한 글들이 나를 많이 아프게 했다. 오랫동안 원망스러운 마음과 서운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가 어느 사이 잊어버렸다.      


아.. 그가, 그때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오지 않고 이 마을로 왔었나 보다. 이제야 그에게서 왜 소식이 끊겼는지 알아차렸다. 갑자기 주저앉아 펑펑 울고 싶어졌다. 안타까움에, 그 청춘이 아까워 발을 동동 굴리며 울었다. 뒤돌아보니 그는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연신 훔쳐내며 고운 길을 한참을 걸었다.      

작가의 이전글 천촌(天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