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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십 살 김순남 Jun 07. 2022

목련꽃 그늘아래서



백목련과 자목련을 한 아름 꺽어 품에 안고 있는, 눈부시게 하얀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가 날 보며 미소짓는다. 순간 저 미소,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듯, 외로워 보이는 듯했던 그 미소, 아! ! 기억났다.   

  

“순임아~!!”      


분명 순임이다. 그런데 아가씨네. 너무 닮았다. 순간 순임이 딸인가? 했지만 이내 아니라 생각했다. 순임이의 가느다란 몸매와는 다르게 딸은 퉁퉁했다. 조심스레 아가씨 앞으로 갔다.     


"우리 어디서 만나지 않았어요?”      


아가씨가 낯익은 미소를 띄며 고개를 살레살레 흔든다.  

    

“글쎄요. 저도 낯이 익기는 한데, 기억나지는 않네요”     


아, 목소리도 닮았다. 갑자기 반가움과 서러움에 목이 확 메어온다. 그대로 자리를 뜰 수가 없다. 주저리주저리 아가씨 앞에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내 친구 순임이도 목련꽃을 많이 좋아했어요. 순임이의 닉네임도 목련이었어요. 내 친구 순임이랑 아가씨는 너무 닮았어요."     


새삼 아가씨을 유심히 본다.      


"어디 아픈데는 없나 봐요?.”     

“녜.”     

"내 친구 순임이는 많이 아팠어요. 아픈 몸으로 남편 뒷바라지도 잘하고 아이들도 잘 키웠답니다. 아이들 앞에서는 아픈 내색을 안 하려고 애썼어요. 혼자 있을 때는 머리도 혼자 감기 힘들어했지요. 한여름 더울 때는 내가 샤워를 시켜 주기도 했답니다.      

“그랬군요. 두 분의 우정이 참 돈독하셨네요”     

"그럼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랐어요. 같은 학교에서 공부했답니다. 순임이가 시집을 일찍 갔어요. 어쩌다가 그런 병이 왔는지 모르겠어요. 팔, 다리, 어깨 모두 인공 뼈를 넣고서 30년 가깝게 독한 약으로 버티며 세 자녀를 훌륭히 키웠지요. 그 몸으로 중풍으로 대 소변을 못 가리는 시어머님도 오랫동안 봉양했답니다. 순임이는 하느님에게도 자식에게도 충성스러웠어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는 착한 친구였답니다.      

어느날 순임이는 드디어 아들이 결혼할 여자를 만났다면서 상견례를 하기로 했답니다. 그때 얼마나 좋아하던지요. 그날 순임이는 자신이 차려입을 수 있는 최대의 옷차림으로 나갔답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하는 말이 너무 아팠습니다. 색시집 부모님이 순임이를 보자, 차디찬 태도로 변해 버리더랍니다. 자리가 끝날 때까지 입을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더랍니다. 결국, 그 혼사는 깨어졌지요. 그 일이 있고 난 후 순임이는 많이 힘들어했어요. 자신이 자식들의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지요. 그녀의 병은 갑자기 많이 안 좋아졌답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 내가 잠든 사이에 날 찾아왔어요. 유난히 눈부시게 하얀 원피스를 입고 왔어요. 같이 영화를 보러 갔지요. 순임이는 영화는 보지 않고 옅은 미소를 띄우며 내 얼굴만 쳐다보았답니다. 나는 화면 속으로 집중해서 들어갔는데 어느 순간에 옆에 앉아있던 순임이가 보이지 않더라고요. 순임이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어요."     


순임이를 닮은 그녀는 내 이야기를 진중하게 듣더니 얼굴에 옅은 연민의 빛을 띠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랬군요, 아마 그 친구분은 지금 다 낳으시고 저처럼 평안하실 거예요. 그러니 너무 그리워하거나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제가 보기에는 할머니가 더 아파 보이는걸요.”     

“그런가요? 그렇게 보이나요?”     

"녜. 그러니 마음을 편안히 하시고 좋은 사람 많이 만나시고 돌아가셔서 건강하게 지내세요.”     

"고맙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만나러 왔어요.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요. 어디에 가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리운 마음을 간절히 가지고 계시면 어디선가에서 꼭 만나실 거예요. 저를 만난 것처럼요. 진실되고 간절한 마음은 우주를 오른쪽으로 돌게도, 왼쪽으로 돌게도 할 수 있는걸요.”      


내 친구 순임이를 꼭 닮은 그녀는 안고 있던 목련 다발에서 하얀 목련꽃 한송이를 빼어 주며 <목련 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한 문장을 읊는다. 나도 모르게 다음을 읊었다.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순임이를 꼭 닮은 그녀가 다음 구절을 또 외운다. 그렇게 우리는 끝까지 주고 받았다. 순임이의 집 마당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서 들어누어 했던 것처럼.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했던 것처럼.      


그녀와 헤어져 오며 혼자서 다시 읊는다. 알 수 없는 설움이 목까지 차올라, 시는 내 입안에서만 맴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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