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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십 살 김순남 Jun 13. 2022

천도복숭아


서둘러 길을 걷는다. 예쁜 집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지붕이 뾰쪽하니 유럽의 어느 작은 궁전 같다. 집 뒤에는 아름드리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낮은 돌담 너머로 보이는 정원에는 작은 분수도 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화초들이 갖가지 꽃을 피우고 있고,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들이 담 가장자리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사이에 진홍색의 천도복숭아도 보인다. 아, 여기가 언니 집이구나, 언니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멋진 집을 부러워하더니, 이런 집에서 공주처럼 살고 싶어 하더니 꿈을 이루었구나. 낮은 담 안으로 언니가 정원을 가꾸는 모습이 보인다. 반가움에 가슴이 쿵탕 거 린다.      


“언니!!!!”      


크게 불렀다. 언니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다시      


“언니이~!!!”      


작은 담에 몸을 기대고 큰 소리로 불렀다. 그때서야 뒤돌아본다.      


“누구 찾으세요?”     

  

언니의 반응에 순간 당황스럽다.  

   

“언니, 나 복남이!!!” 

      

언니가 배시시 웃는다.     

 

“사람을 잘 못 보셨나 봐요.”     


아, 그러고 보니 언니가 좀 달라졌다. 배시시 웃을 때 살짝 들어가는 볼우물은 좀 더 깊게 들어간 듯하고 굽실굽실 어깨까지 흘러내린 머리는 칠흑처럼 검다. 살짝 웃는 모습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 젊었을 때의 고운 미소다.  

    

“언니 너무 예뻐져서 내가 못 알아볼 뻔했다. 언니는 내가 너무 늙어져서 못 알아 보나 봐.”      


내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짓는 언니 뒤에서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아이가 달려든다.     


“엄마!!” 

“어머 언니!! 아들이야? 세상에 ~~ 언니 너무 좋다. 나 한 번 안아 보고 싶어”      


담 밖에서 설레발을 치는 내가 이상한지 아이는 언니를 보며 “누구야?” 한다.    

  

“집을 잘못 찾아오셨나 봐.”     


황당한 언니의 반응에 어쩔 줄을 몰라하는 나에게 언니는 천도복숭아 나무에서 탐스러운 복숭아를 하나 따서 담 너머로 내민다. 내가 손을 내밀자 손바닥에 복숭아를 올리고 꼭 감싸 쥐며 다정하게 말한다.    

 

“목마를 때 드세요.”     


그리고는 돌아서서 아이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아.. 언니!! 언니!!      


나는 황망하여 큰 소리로 언니를 불렀다. 아이가 뒤 돌아본다. 갑자기 발레 동작으로 가벼이 폴짝폴짝 뛰어 담 앞까지 와서 가벼이 손 키스를 내밀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날려주고 돌아간다. 아이의 예쁜 미소를 마주하고서     


"아~ 너구나!! 반갑다. 애기야!!.'     


순간, 지난 시간의 반가움에 눈이 화들짝 커졌다. 언니는 딱 한 번, 아이를 잉태했었다. 언니의 산후조리를 위해서 아이가 나올 거라는 날짜에 맞추어 올라가려고 했는데, 병원에 와 있다고. 앞서 연락이 왔다. 부랴 사랴 언니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가서야 알았다. 언니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아이는, 자기 집에 들어가 있지 않고 나와 있었다. 지금의 의학이었다면 좀 더 일찍 그 사실을 알았을 터인데.. 그렇게 황망히 아이를 보냈었는데..     


장난기 어린 미소와 발레 몸짓으로 다가와 인사를 주던 아이를 생각하니, 그 사랑스러운 모습이 오히려 마음을 찢어지게 한다. 아이에게 발레를 가리키나 보다. 언니는 어릴 때 발레를 배웠다. 그 당시에는 참 귀한 것이었는데, 언니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그런 쪽으로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고 엄마가 배우게 했었다. 참, 기억난다. 고등학교 학예회 때는, 화랑 원술랑 공연에서 남자 주인공도 맡았었다.      


가산이 기울어지면서 더 이상 언니의 꿈을 뒷받침해 주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혼자서 가정을 돌봐야 했던 엄마를 도와 집안일을 했던 언니는, 내 운동화도 하얗게 빨아놓고, 교복 칼라도 풀을 빳빳하게 매겨서 달아주었다. 주마등처럼 이어 떠 오르는 언니에 대한 옛 기억은  나를 아픔과 슬픔과 그리움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다.      


시어머니와 오빠가, 언니가 날 몰라 볼 거라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담벼락에 기대어 주저앉아 한없이 울었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나. 내 마음과 기억 속에는 아직도 언니가 쌩쌩하게 들어앉아 있는데, 언니는 그사이에 날 까맣게 잊어버리다니. 울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마음 한편으로는 고맙고 감사했다.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다니. 떠나보낼 때, 울어줄 피붙이가 없어서 얼마나 가슴이 저렸는데..      


언니에게 인색했던 내 행동도, 마음도 미안하고 미안해서, 후회가 되어서 아직도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데, 언니는 서운하고 섧었던 시간을 다 잊어버리고 살고 있구나. 아린 가슴 한편에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자리 잡는다. 아기도 만나서 잘 키우고, 우리가 어릴 때부터 꿈꿨던, 아름다운 궁전 같은 곳에서 공주처럼 살고 싶었던 소망도 이루었네. 그렇게 살고 있어서 고마워. 내가 언니에게 했던 서운했던 말, 행동들, 다 잊어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날 못 알아보면 어때, 그렇게 잘 지내면 그걸로 좋지.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그리움과 후회는 오로지 내 몫인걸. 그 마음을 감당하며 사는 것이 언니에 대한 미안함과 후회에 대한 속죄라면 그렇게 해야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담 너머로 언니의 집을 다시 눈에 담는다. 아름다운 문양이 있는 품위 있는 문을 응시했다. 혹시라도 언니와 아이가 다시 나와 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하면서.     

 

텔레파시가 통했던 걸까? 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아이가 다시 그 상큼하면서도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우며 손을 한 번 흔들어주더니 문을 닫는다. 아이는 집을 잘 못 찾아와 자기 엄마를 언니라 부르는 정신 나간 할미가 우습고 신기했었나 보다.      


언니는 이미 내 기억 속 저편으로 건너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꾸려가고 있는데, 나는 왜 이리 청승맞게 지난 시간을 못 잊어 연연해하고 있는지, 미련스러운 나 자신을 꾸짖으며 애써 발걸음을 돌렸다. 언니를 만나면 엄마 아버지 소식을 묻고 싶었다. 그런데 언니는 나를 잊었으니 엄마 아버지는 훨씬 전에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타박타박 보도블록도 하늘도 온통 하얀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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