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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십 살 김순남 Jun 14. 2022

소멸


언니를 보고 나니, 아버지 생각이 더 간절하다. 아! 아버지. 아버지는 어디에 계실까? 여기로 오는 기차를 탄 것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가 첫 번째였다. 내 일생에서 내 곁을 가장 먼저 떠나신 분, 가슴 저리도록 아버지가 그립다. 


아버지 오십에 날 낳았으니, 그 애틋한 사랑 속에 세상이 내 것 인양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 사랑은 받지 못하셨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방법조차 모를 때 아버지는 나를 떠나셨다. 뒤늦게, 아주 뒤늦게 아버지의 사랑을 추억했다. 아버지의 사랑에 응답 못 했던 내 어린 행동이 가슴에 한으로 남았다. 아버지 사랑했습니다. 아버지 너무 고마웠습니다. 만나서 인사라도 하고 싶다. 


시간이 없다. 오늘 하루에, 돌아가는 기차는 한 대밖에 없다. 바쁜 마음에 절로 발걸음이 빨라진다. 처음 구름 문으로 들어섰을 때 보이던 정자가 또 보인다. 몇몇 사람이 앉아서 쉬고 있다. 혹시 아버지도 저런 정자에서 쉬고 계실지 모르겠다. 정자 쪽으로 갔다. 


모두가 할머니, 할아버지시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길에 홀로 바쁘게 걸어오는 내 모습이 생경스러웠을까, 모두 나를 향하여 있다. 갑자기 당황스럽다. 애써 쾌활하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날씨가 너무 좋아요. 이 동네 너무 좋네요.”


내 인사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 멋쩍어 혼자 또 말을 잇는다.


“아버지를 만나러 왔는데 못 만났어요.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그때서야 그들의 표정이 모두 놀람으로 바뀐다. 한 할머니가 불쑥 말을 거신다.


“살러 온 사람이 아니오?”

“네. 오늘 하루 짬을 내어 왔어요. 어머님도 만나고 오빠도 언니도 친구들도 만났는데 아버지만 못 만났어요. 너무 오래전이라 이 동네 안 사시는지 모르겠네요. 꼭 만나고 싶은데, 너무 보고 싶거든요” 


한 할머니가 바싹 내 앞으로 당겨 앉으시며 속삭이듯 물으신다.


“오늘 돌아간다고요?”

“네에 ~ 기차가 한 편밖에 없대요. 기차 놓치면 큰일인데.. 아이들에게 자고 간다는 말 안 했거든요.”


모두 내 앞으로 슬금슬금 모여든다. 내 얼굴을 빤히 본다. 이 뜬금없는 상황에 몸이 살짝 움츠러든다. 한 할머니가 다짜고짜 내 손에 뭔가를 슬쩍 쥐어준다. 놀래서 손바닥을 펴 봤다. 

“어머나!!!” 


꽤 도톰한 금반지다. 자세히 보니 이니셜도 찍혀있다. 


“가지고 가세요.”

“녜에 ~??, 아니 처음 보신 저에게 이것을??” 


또 한 할머니가 조용히 다가오시더니 아예 작은 주머니를 채로 건네주신다. 놀래서 주위를 보는데, 거기 계신 모든 사람이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주시하고 있다. ‘이 상황이 뭐지?’ 당황해하지 말고 물어봐야겠다. 


“아니, 지금 막 만난 사람에게 이런 걸 주시다니, 선물은 아닐 테고요. 저 동네 누구에게 전해 줄 사람이 있나요? 제가 시간이 넉넉한 사람이 아니라.. 너무 먼 곳에 살면..” 


당황해서 이 상황을 수습하려 하는데, 그때야 점잖게 생기신 할아버지 한 분이 할머니를 나무라시는 투로 말씀하신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하면 나그네가 놀라지요. 우리 처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 주세요.”


그때서야, 제일 먼저 금반지를 내어놓으신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사실, 이 동네에서는 이게 큰 짐 이라우. 이 동네로 올 때는 아무것도 안 가져와야 하는데, 그걸 몰랐지 뭐요. 우리야 안 가지고 오려해도, 아이들이, 친구들이, 자꾸 여비 해야 한다며 찔러주니 어쩔 수 없이 가져오게 된 것인데, 여기서 이게 이렇게 걸림돌이 될 줄 어떻게 알았겠우. 몸에 지닌 것 없이 새털처럼 가벼운 몸이라야 새집을 분양받아 입주할 수 있는데, 어쩔 수 없이 자연 소멸될 동안 이렇게 정자에서 지내기만 한다우. 자리 잡고 들어앉아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데..”


“아.. 그게 그렇게 되는 거군요. 저도 여기 들어올 때 관리인 아저씨에게 핸드폰까지 다 맡기고 들어왔어요”

“그러니, 꼭 부탁해요.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다니, 이런 행운이 어디 있겠어요. 우리가 저 동네에서 그래도 나쁘게 살 지는 않았나 보우.”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분들의 이런 행동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도와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직접 가서 전해 드리지는 못하지만, 우편으로 보내드릴 수는 있으니 받으실 분 주소와 이름을 적어서 같이 주세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든 분이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들을 내어놓으셨다. 크고 작은 금반지와 지폐, 염주, 묵주도 있다. 


“받으실 분 주소와 이름을 적어서 같이 주셔야죠, 이렇게 그냥 주시면 제가 알 수가 없죠.” 


주소와 이름을 적어 달라는 내 말은 귀에 들리지 않으시는지, 귀중하게 지니고 있던 것들을 내어 놓고서는, 환한 미소를 띠시며 모두 정자를 내려가신다. 그리고는 눈부신 보도블록 위로 소리도 내지 않고 걸어가신다.


그 모습을 멍하니, 내 시야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다가 정신 차리고 내 앞에 쌓여있는 것들을 본다. 지폐가 낯설다. 


“어머!! 이건 언제 적 발행이야? 년도가..!! 세상에..,!!”


그럼 이것을 내어놓으신 분은 그때부터 이 정자에서 지내셨다는 말인가? 라일락 향기가 지천에서 풍기는 아름다운 하늘 동네라 해도, 정자에서만 이토록 오래 지낸다는 것은, 그 또한 만만치 않은 수난의 시간이었을 터이다. 


마음이 묘하게 아팠다. 내 앞에 놓인 것들을 쓸어 모았다. 순간, 나도 그것들을 넣을 곳이 없다는 생각이 났다. 들어올 때 관리인 아저씨께 배낭을 맡겨 놓고 왔다. 손으로 옷을 더듬어 본다. 다행히 호주머니가 있는 바지를 입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반가운 마음에 그것들을 쓸어 담아 호주머니에 넣었다. 금붙이는 워낙 작은 것들이라 부피가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러 개여서 무게는 꽤 묵직하다. 


오래전 지폐는 만지기가 조심스러울 정도로 바스락거린다. 아..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소멸되어 가는구나. 문제는 금이겠구나. 지폐보다 금덩이가 소멸의 시간이 길겠구나,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정자를 나와 걷는다. 


사람의 마음이란 묘하다. 아무 생각 없이 비어 진 마음으로 지금껏 걸어 다녔는데 호주머니에 뭔가가 묵직하게 담겨있으니 생각이 거기로 미친다. 아무도 보내어야 할 주소와 이름을 적어주지 않았다. 이것을 내가 다 가져도 아무도 모른다.


음.. 모두 얼마나 될까? 옛날 화폐는 고액으로 팔 수 있을지도 몰라. 이런 생각으로 걷다가, 내 생각에 기가 차서 내가 웃는다. 조금 전 할머니 할아버지는 가지고 있는 것을 못 버려서 애를 태우고 계셨는데,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나에게 주고서는 겨우 거기에서 해방되신 듯 홀가분한 미소를 지으셨는데, 그것을 좀 전에 보고서도 나는 내 호주머니에 가득 차 있는 것들에, 그것도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인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고 있다니 참, 나는 구제 불능이다. 


혼자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자책하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뒤돌아보았다. 노인분들이 총총걸음으로 사라진 길을 본다. 어디들 가셨을까? 이제 아무것도 지닌 것이 없다고, 주민센터나 관리실에 신고하러 가셨는지 모르겠다. 빨리 좋은 집 분양받아 들어가셔서 편히 쉬셨으면 좋겠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황당했지만, 좋은 일을 한 것 같아 마음도 발걸음도 한결 편하고 가볍다. 


걸어가는 내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흥얼거림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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