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과 나의 사막
결국 이 모든 건 네가 그립다는 뜻이야
* 주의 *
'랑과 나의 사막'의 독후감인 이 글은 책을 읽지 않은 분들께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책을 읽기 전에 내용을 알기 원치 않는 분들께서는 뒤로 가기를 눌러 주세요.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
언젠가 누가 내게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나는 이야기가 담긴 모든 것을 좋아하지만 그것들을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제대로 대답을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오늘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답을 찾았다.
다정함을 닮고 싶어서. 표정이나 목소리를 함께 담을 수 있는 말과 다르게 글은 내가 쓰는 단어만으로 온도가 정해진다. 나와 일상을 주고받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말에 온기가 묻어났으면 했다. 그런 면에서 랑과 나의 사막은 내가 정말 닮고 싶은 다정함이 쓰여 있었다.
랑의 엔진이 꺼졌다.
아니, 심장이. 남겨진 고고와 지카는 랑의 장례를 마치고 떠날 준비를 한다. 바다로 간다던 지카는 고고에게 같이 가자는 제안을 하지만 고고는 '과거로 가는 땅'으로 가기로 정한다. 이렇게 랑과 나의 사막은 시작된다.
고고는 로봇이다. 버려진 로봇을 랑이 발견하고 고칠 수 있는 사람을 수소문해 다시 움직일 수 있게 살려내면서 로봇은 고고가 되었다. 고고는 자신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감정을 흉내 낼 수 있을 뿐 느낄 수는 없다고 믿고 전쟁이 벌어진 시기에 만들어졌기에 죽이기 위해 설계된 존재는 아닐까 의문을 가진다. 여정의 끝에서 고고는 정체성에 대한 답을 찾고 다시 랑을 만나러 간다.
고고의 조개껍데기
지카와 함께 바다에 갈지, 혼자 여기에 남을지 아니면 아예 다른 선택을 할지. 오로지 자신의 결정이 필요한 순간에 고고는 랑을 떠올린다. 이따금 랑은 고고에게 선물을 주곤 했는데 어떤 걸 가지고 싶은지 골라보라고 한 건 조개껍데기가 처음이었다. 대답을 하지 못하는 고고를 두고 랑은 본인의 마음에 드는 것을 고고에게 건넨다.
마음에 드는 걸 가져야 하는 게 아닌지 고고가 묻자 랑은 마음에 드는 걸 선물해야 선물한 것을 보고 싶어서 자꾸 너를 보러 갈 게 아니냐고 답한다. 랑이 건넨 조개껍데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본 고고는 조개껍데기를 다시 건네면서 말한다. 나도 이게 더 마음에 드니 네가 이걸 가져야 한다고.
고고에게 묻고 싶었다. 조개껍데기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랑을 위해 조개껍데기를 다시 건네는 게 마음이 아니면 무엇인지. 랑을 읽고 랑이 좋아하는 것을 주고 싶어 한 건 오로지 고고가 결정한 일이었다. 과거로 가는 땅을 선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전부터 고고에게는 마음이 있었다. 조개껍데기에 가려져 미처 알지 못했을 뿐.
나는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다
사막을 건너는 중에 고고는 땅 밑에서 누군가 두드리는 듯한 둔탁한 소리를 듣고 모래를 파낸다. 파낸 모래에서 나온 관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들어있었다. 고고에게 감정을 알려준 건 랑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듯 고고는 랑의 다정함을 닮았다. 버려진 고고를 지나치지 않은 랑처럼 고고도 사막에서 만난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과거를 더듬을 땐 혹시라도 과거의 날카로움에 베이지 않기를 바라며 끝도 없는 외로움에 지쳐 죽는 것을 바라는 듯한 모습엔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건넨다.
언젠가 다른 사람이 힘든 것을 걱정하는 말에 그런 것까지 챙길 여유가 있냐는 소리가 돌아온 적이 있다. 어떤 마음으로 한 말인지 알지만 그럼에도 외로운 마음이 들곤 했다. 모두가 조금씩만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 모두 조금씩은 덜 힘들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했다. 내가 랑을 자처했을 때, 누군가는 고고가 되어주지 않을까 혹은 어떤 랑을 보고 내가 고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은 여전히 가지고 있다. 사막에서 제일 두려운 건 외로움일 때가 있으니.
그러니 나는 당신이 혼자 힘들지 않았으면 한다.
중요한 건 결과보다 행위
고고는 두 팔을 모두 잃은 로봇을 만나 자신의 한쪽 팔을 내어준다. 자신을 알아이아이라고 소개한 로봇은 고고가 만들어진 이유를 묻지만 고고는 모른다고 답하며 자신이 전쟁 때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람을 해칠 목적으로 만들어졌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 이때 랑을 해칠 수 있다는 고고의 두려움이 드러나는데 알아이알아이는 고고는 그런 행위를 하거나 그런 판단을 내린 적이 없으니 상관없으며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닌 행위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행위다. 위안이 되면서도 동시에 반성이 되는 말이다. 설령 사람을 해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더라도 고고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한 적도, 그런 판단을 내린 적도 없다. 나는 어땠는가. 상황이 이렇다고 하면서 도망치지는 않았나,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안 하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다시 글을 쓰게 만든 것도 이 말이 컸다.
네 마음은 진짜야
과거로 갈 수 있는 땅에 도착한 고고는 지구의 사람들보다 시간을 훨씬 느리게 사는 다른 행성의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살리의 기억 속에서 고고는 전쟁시대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임이 밝혀진다.
고고의 과거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 아닌 것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살리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고고가 그럴 수 있었던 걸까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렇게 프로그래밍된 로봇이었기 때문이고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 하지만 이내 답이 이미 나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중요한 건 결과보다 행위. 고고가 그렇게 설계된 로봇이라 해도 고고는 랑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마음을 보여줬다. 랑이 없음에도 사람을 살렸으며 사람이 아닌 것의 어려움에도 고고는 걸음을 멈췄다. 고고의 마음은 진짜다.
선인장 신에게
선인장은 사막에서도 살아남았고 랑은 이것이 사막이 선인장을 사랑하는 증거이며 선인장의 신에게 기도를 해야하는 이유라고 했다. 나도 랑과 고고를 위해 기도를 드려본다. 부디 고고가 무사히 과거로 가 랑을 만났기를, 랑에게 사막을 건너며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서로의 시간을 맞춰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