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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는 모두 왕의 사람이다.
옷소매를 붉게 물들인 것이 그 징표라 했다.
옳다. 궁녀는 모두 왕의 사람이다. 한데'궁녀가 아닐 때의 그들'도 왕의 사람이기만 했을까.
꼴깍, 꼴깍
쥐 죽은 듯 조용한 대궐 처마 아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긴장 어린 침 소리만이 소란스럽다. 무엇에 이렇게 생각시들이 숨죽이고 있는가 하니. 또래 무리의 맨 앞에서 이야기꾼 흉내를 내고 있는 덕임의 낭랑한 목소리 때문이다. 같은 이야기 책이 분명한데도 덕임의 목소리를 빌리면 곱절은 더 몰입이 된다. 이쯤 되니 책을 읽어달라 엽전이니 패물이니 하는 것들을 덕임에게 쥐여주는 건 예삿일이다. 덕임은 이렇게 모인 재물들로 궐 밖 셋이나 되는 오라비들의 과거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똑 소리 나던 성격이 일을 내고 말았으니, 운명의 시작이었다. 곧 계례식도 치르건만 나인들의 텃세에 밀려 십수 년 간 별간을 지키던 덕임은 수상한 사내를 만난다. 갑자기 들이닥쳐 이것저것 캐묻는 사내에게 화가 난 덕임은 벌컥 성을 내고 그를 내쫓는데..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다.
자신이 화를 내며 내쫓던 사내가 자신이 모시고 있는 '동궁'임을.
가늘고 길게. 적디 적은 선택지들 중에서 최대한 자신을 지키려고 했던 덕임의 생이 크게 흔들리게 될 시간이었다.
01 성덕임
궁녀는 선택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덕임은 그것을 알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선택지가 소중했다. 별 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것임을 알면서도 필사하는 일에 영희와 복연이를 끼워 이름을 올려준 것이 그랬고 세손이 부러 일을 주어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뻔함에도 본인이 고른 일거리를 놓지 않는 것이 그랬으며 내 사람이 되고 싶냐는 동궁의 물음에 그저 스스로의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대답이 그랬다. 덕임은 언제나 작은 것이라도 자신이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랐다. 궁녀이기 이전에 사람이었다.
물론 현실과의 타협은 필요했다. 부모님을 여읜 후, 궁녀는 절대 안 된다던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부터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본의 아니게 일찍 들어 버린 철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 짓게 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쪽에 걸었다. 참, 강한 사람이다. 처음에는 주체성을 가지고 맞부딛히더라도 언젠가 타협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그걸 인정하는 순간, 지워진 선에 주체적인 모습은 흐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덕임은 선을 좁혀 그을지언정 지우지는 않는다.
궁의 일 말고도 덕임의 삶에는 중요한 것이 많았다. 생각시 시절부터 함께였던 동무들과 언제 봐도 애틋한 세 오라비들. 온전히 성덕임으로써의 삶에서 얻은 것들이다.
새침하다 못해 까칠하지만 잔질은 구석이 있는 경희, 눈치는 없어도 덩치만큼이나 의리가 든든한 복연, 여리디 여려 눈물 마를 날이 없는 영희. 넷은 항상 함께였다. 지친 날에도 동무들에게 푸념을 늘어놓다 보면 어느샌가 웃음이 터져 뭐가 고민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서로 잡아먹을 듯이 굴다가도 서로가 아닌 사람에게 맞고 오는 꼴은 보질 못했다. 나중에 나이가 들면 나이 든 궁녀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가 다 같이 살자고 약속도 했다. 궐에서는 그렇게 숨을 쉬었다.
동무들이 숨구멍이라면 가족은 버팀목이었다. 덕임의 집안은 대대로 무관을 지냈다. 남들은 뭐라 할지 몰라도 덕임은 그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오라비가 과거에 합격해 할아버지, 아버지로 이어지는 그 길을 잇는 것이 덕임의 또 다른 소망이었다. 그것이 부모님과 자신을 잇는 중요한 고리라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꿋꿋하게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소중하게 생각한 이 모든 것들이 왕의 손짓 하나에도 쉬이 바스러질 수 있다. 그것이 두려워 덕임은 선을 더 깊게 그었다.
02 왕
왕은 가진 것이 많았다. 가진 것이 많은 만큼 지킬 것도 많았다. 그 많은 것들에도 아쉬움이 드는 한 가지는 있었다. 동궁에 머무를 적 별간 하나가 잊히지 않았다. 감히 먼저 자신을 외면한 괘씸함에 저 멀리 박아두었으나 마음 한편에는 계속 별간 하나만큼의 자리가 남았다. 원한다 말했다면 언제든 채울 수 있었을 자리였다. 허나 그러지 않았다. 사사로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 않다. 원칙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그는사람이기 이전에 왕으로 살았다.
언제나 달려 있는 눈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시작되는 빽빽한 일정들, 읽어야 하는 수많은 상소들과 언제라도 논쟁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는 신하들. 여기에 때때로 추가되는 생명의 위협까지. 지존의 자리, 정말 아무나 할 게 못 된다 싶지만 왕은 진심으로 이 자리를 축복이자 행운이라 여겼다. 평범하게 태어났다면 어땠을지 생각해본 적 있냐는 말에도 왕이 아닌 자신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노라며 못을 박았다.
신념이 아주 대쪽 같다. 대쪽 같을 뿐 아니라 옳기까지 하다. 옳은 말을 하며 그 말을 그대로 행하니 실로 무서운 사람이다. 비뚤어진 길을 가도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을 것 같은 가족사에도 올곧고 그렇게 하는 것에 일말의 망설임이 없다는 게 대단했다. 마땅히 그래야 하기에 그렇게 행한다. 어떻게 이런 단순하고 곧은 신념이 있을 수 있는지. 본인은 하지 않으면서 남한테 기준을 들이댄다면야 혀를 찼겠지만 반발을 하려 하면 본인은 이미 그렇게 행동하고 있으니. 역시 다른 사람에게 할 말이 있으려면 나부터 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배웠다.
사람이기 이전에 왕이다. 그것도 스스로 공명정대하기를 자처한 왕이다. 마음이 있다고 해서 잔질게 달콤한 거 하나 물려주는 것도 남들 눈이 있고 그래서는 안되기에 못 한다. 그러니까 애정사가 순탄할 리가 있냐구.
03 두 사람
서로 너무 다르다. 가진 선택지가 없어도 스스로가 내린 답이 소중한 사람과 모든 걸 선택할 수 있음에도 정해진 답이 이미 있는 사람. 덕임은 궁녀이기 이전에 성덕임이 소중했고 왕은 사사로움보다 모두를 살피는 어전이 우선이었다. 여기에 서로의 위치까지 고려한다면 둘이 만났을 때 먼저 속이 문드러지는 쪽이 누구일지는 너무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상황은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언제나 왕을 이해하고 져주는 것을 선택하는 쪽은 덕임이었다. 물론 서로가 만나 웃는 날도 많았다. 아이의 첫 태동을 알린 날, 크게는 들어주지 못해도 꽃구경을 하고 싶다는 말을 기억해 나들이를 시켜주었던 날, 아이에게만 복조리를 만들어주었다며 덕임이 만든 것만을 뚝 떼어 가져간 날, 왜 의빈으로 지었는지 설명을 해주던 날. 모두 소중한 나날들이었다.
단지 궁궐이 너무 가혹했을 뿐이었다. 아이를 배었음에도 앞서 출산을 기다리던 후궁이 있어 온전히 기뻐할 수 없었고 낳은 아이는 모두 중전의 자식이라는 법도에 따라 편히 어머니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아이를 잃었음에도 장례를 참석할 수도, 온전히 슬픔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지난 날 세손 앞에서도 꿋꿋이 제 뜻을 밝히던 덕임이 점점 지킬 것이 많아지고 생각할 것이 늘어나면서 당찼던 모습을 잃어가는 것이 보여 안타까웠다. 게다가 아들이 보위에 오르자마자 오라비는 관직을 잃었다. 그것이 부모 자식을 잇는 유일한 끈이라 여겼던 덕임에게 너무한 처사였다.
짊어진 것이 많은 왕의 사랑이란 그랬다. 참 모질다 싶을 정도로 공평하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습관을 들여야 했던 탓인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다는 질문들에서도 의표가 숨어 있다. 그러면서도 덕임이 어디 도망가진 않을까, 마음을 확인 받고 싶어하는 것이 보여 이쪽도 안쓰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덕임의 마지막을 지키는 데 본인이 아닌 벗들을 찾았다는 말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업자득이라는 생각도 조금 해본다.
여전히 날 사랑하지는 않을 테냐는 마지막 물음에 대한 답은 듣지 못했더라도, 결국 사랑이었음을. 늦게라도 알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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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서브 남주를 꼽자면 홍덕로가 아닌 오동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장 한번 하지 않는데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된 후에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까지 나오다니. 게다가 왕의 질투도 산 몸이다. 이 정도면 정말 섭남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