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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생각 Oct 08. 2021

그린나래, 하늘을 날다

 지역의 방송작가라고 해서 모두가 <6시 내고향> 같은 프로그램만 하는 것은 아니다. 서울에서는 각 장르의 작가들이 나뉘어서 활동을 하고 있다면 지역에서는 장르가 나눠지거나 그런 것은 없다. 다큐멘터리도 하고, 예능 같은 프로그램도 하고, 교양 프로그램도 한다.    

  나의 첫 다큐멘터리는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야 하는 시기에 나의 아이디어의 채택으로 시작되었다.     

  “장애인 중에서 악기를 잘 다루는 사람들이 있는지 찾아보고 그 사람들을 모아서 밴드를 결성하는 건 어때요?”    


  작가로 1년도 되지 않았던 때였지만, 왠지 자신이 있었다. 좋은 구성이 될 것 같았다.

당시 PD님은 어린 작가에게 1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 2부를 선뜻 맡기셨고 나는 그때부터 처음으로 다큐멘터리 작가로 준비에 들어갔다.    


  먼저 울산에 있는 모든 장애인 관련 단체와 복지관, 협회 등에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 제작 관련하여 악기를 다룰 줄 아는 분이 계신다면, 혹시 악기를 배워보고 싶은 분이 계신다면 회신을 부탁드린다>는 공문을 보냈다. 팩스 보내는 데만 1-2시간은 넘게 걸렸나 보다. 그리고 연락이 오길 기다렸다.    


  하루가 지나고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제일 먼저 연락이 온 곳은 지체장애인 협회였다. 드럼을 치시는 분과 키보드를 치는 분이 계시다고 했다. 이름과 연락처, 다루는 악기를 적고 다은 전화도 기다렸다. 그때 연락을 기다리던 일주일은 어느 때보다도 길었다.    


  그렇게 울산 최초의 장애인 록밴드가 탄생했다. 몸은 조금 불편하지만 열정과 재능으로 뭉친 5명의 멋진 사람들. 밴드 이름을 짓는데도 의견이 분분했지만, 나는 다같이 멋지게 날아보자고 ‘그린 듯이 아름다운 날개’라는 뜻의 ‘그린나래’를 제안했고, 우리는 그린나래가 되었다.    


  막상 악보를 볼 수 없는 기타리스트와 휠체어 없이는 이동이 힘든 베이스, 지적 장애를 가진 막내팀원까지 정말 악기 연주를 가르치고 무대에 올릴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긴 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고난의 연속이 아닐까? 우리 그린나래를 가르쳐줄 선생님이 필요했다. 일반 강사는 모든 악기를 다루진 못할 것이고, 울산에 있는 큰 기업 안에 밴드를 결성해서 취미활동을 하는 분들이 있지 않을까 하고 회사 홈페이지 및 인터넷 카페 등을 마구 뒤졌다.    


  그렇게 삼성SDI에 밴드활동을 하는 동호회와 연결이 되고 그린나래 멤버들은 연습실도 생기고 악기 연주도 배울 수 있었다. 다행히 메인 기타와 보컬을 맡은 병희 씨는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다. 비록 보이진 않지만 모든 소리를 듣고 그대로 따라하는 엄청난 능력자였다. 보컬이 부족함이 없으니 든든했다. 드럼을 맡았던 형식 씨 역시 실력이 출중했고, 특히 다른 멤버들을 많이 도와주셨다. 그리고 베이스를 맡았던 천규 씨 역시 어느 정도 실력자였고, 다들 너무나 잘 따라와 주셨다. 일도 하시고 연습도 하시고 힘드셨을 텐데 불평 없이 이런 기회를 얻게 된 것 자체가 행복하다고 하셨다.    


  그린나래 팀의 결성부터 연습하는 모습, 팀원들이 일하는 모습, 힘들어하는 모습, 웃고 우는 모습을 몇 개월에 걸쳐 카메라에 담았다. 일주일에 2~3번씩 항상 모여 연습을 했다. 실력이 조금씩 늘어가는 것도 보였고, 목표로 한 무대 공연날짜가 성큼 다가오자 나 역시 그들과 한마음이 되어있었다.   

 

   다큐멘터리의 구성은 한 편의 글을 적는 것과 같다. 기승전결, 갈등도 있고 문제 해결 과정도 있어야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부족했던 모습과 서툰 악기 연주에 힘들어하는 모습도 담았다, 불협화음도 나고 가끔은 오해도 생겨 갈등 상황이 오기도 한 모습, 그야말로 카메라가 몇 달을 팀원들을 따라다녔고 그것이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마지막 무대 공연은 멤버들의 피나는 연습으로 별 탈 없이 끝낼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하고 감사했다. 다큐멘터리 글을 쓸 때는 1시간이라는 호흡이 쉽지는 않았지만, 팀원들과 함께 한 시간이 있었기에 누구보다 잘 표현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족한 것투성이였다.    


   다큐멘터리 때문에 결성된 장애인 록밴드였지만, 멤버 모두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게 된 계기가 되어 울산 중앙병원에서 환자들을 상대로 위문공연을 펼치는 등 그때 당시에 지역의 크고 작은 행사에서 수십 차례에 걸쳐 공연했다. 다른 방송사에서도 촬영하고 싶어 했고, 인터뷰 요청도 많이 받았다. 그린나래 팀은 나에게 매니저를 맡으라 했다.    


  “ 하작가가 우리를 모아놨으니 매니저로 끝까지 책임져!”   

 

  그린나래 팀은 방송에, 신문에 알아보는 관객도 꽤 있을 정도로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유명인사'가 됐다. 처음에는 그저 음악이 좋아서 만났지만, 점점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넘어선 희망과 감동의 아이콘이 되어 갔다.  

  

  음악이 있었기에 아픔과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고, 그늘지고 소외된 모든 이들에게 희망의 음악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 그린나래.  자작곡 ‘그린나래’까지 발표하고 중간에 멤버 교체도 있었지만, 울산의 최초 장애인 록밴드 그린나래는 여전히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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