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논현역에서 9호선 급행열차로 출근한다.
내가 타고나면 거의 만차가 되어 출발한다.
노량진역은 내리는 사람은 적고
탈 사람은 꽤 있는 곳이라 출근 시간 때는
하마터면 내릴 기회를 놓쳐 버리는 곳이다.
내릴 사람들은 미리 출입문 앞에 자리를 잘 잡거나
힘으로 사람들을 물리치며 나와야 한다.
이럴 때 쓰는 표현 "저...잠.시.만.요."
노량진에서 내릴 사람은
이 열차에서는 힘없는 소수자들이다.
내 직장이 노량진이 아니라 다행이다.
내 성격상 폐를 끼치지 않고 내릴 전략을 짜느라
아침부터 머리가 피곤해질 것이니까.
"여의도 여의도 역입니다. 이번 역은 내리시는 손님들이 많아 출입문을 여유 있게 열어 드리니 천천히 안전하게 하차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번에 내린다. 승객의 절반 이상이 내리는 곳.
나는 다수파에 속해 있다.
출입문 쪽으로 몸을 돌린 자, 나의 동지들이여!
출입문이 열리면 나는
장마철 홍수에 저항 없이 몸을 맡기며
떠내려가는 소가 된듯한 기분이다.
그런데 저기 거센 물살의 저항을
버티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바로 '이번 역에 내리지 않는 사람'
그는 소떼에 휩쓸려 출입문 밖으로
떠내려가지 않도록 전력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몇몇 짜증 난 소들의 미간에 거친 주름이 잡혔다.
그때 대장 소로 추정되는 여인이 호통쳤다.
"좀. 내렸다가 타시죠!"
욕 한마디 없는 문장으로도
짙은 분노와 혐오를 담아내는
그 여자의 재능에 경외감이 들었다.
나는 회사까지 걸어가면서
그 남자의 기분이 신경 쓰였다.
주위를 잘 살피지 못하고
남의 시선에 둔감한 사람일 수는 있겠다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문을 막아서고 있는 사람들도
그런 기분 나쁜 소리를 듣지는 않는다.
다수와 소수의 비율이 50 대 1 정도가 넘어가면
'다수의 이익에 반하는 것들은 논증 없이 쉽게 제거될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좀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명문화되지도 않은 '성숙한 시민의식'을 내세우며
남에게 배려를 강요하는 것보다는
내가 잠깐 불편해도 참는 것이 난 좋은 것 같다.
그녀의 직장이 노량진이었다면
어떤 식으로 열차에서 내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