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은 벌써 세 나라의 말을 하네요! 와 부럽다. 어떻게 공부시켰어요?" 이 질문은 정말 자주 듣는다. 윤슬이 와 슬아는 12살 9살이고 일반 초등학교에 다닌다. 제주에서 산다고 하면 국제학교를 보내려고 갔겠거니 지레 짐작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의 자력으로 국제학교를 보내기엔 경제적인 여건이 안된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남편이 성실하게 일하고 필요치 않은 곳에 돈을 쓰지 않는 끝에 빚 없이 그나마 살고 있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그곳에서 마쳤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티브이에서 나오는 외화 시리즈에 꽂혀 아이들과 노는 것도 뒷전이었다. 가시나무새, 맥가이버, 천재소년 두기, 전격제트작전, 주말의 명화 등등은 나의 애정 시리즈였다. 이걸 안다면 나와 비슷한 연배일 것이다. 수요일 밤 11시에 맥가이버가 방영이 되는 시기가 있었다. 집에서 아빠가 친구들과 모임을 하셨는데 늦게까지 하실 것 같았다. 초등학생이던 내겐 그 시간까지 기다리기가 고역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아빠 옆에서 있다가 도저히 안돼 아빠에게 부탁했다.
"아빠 11시에 깨워줘"
"응 알았어"
하지만 내가 깨어보니 아침이었다. 그날 아침 나는 엉엉 울며 학교를 갔다.
한 번은 토요일 오후 '두기'를 보고 있는데 엄마가 하소연하듯 내게 말하셨다.
"너는 미국 사람이 그렇게 좋냐! 그 나라 가서 살아라"
"엄마, 보내줘! 정말 가고 싶어!"
열 살이 겨우 넘은 아이에게 그 마음은 진심이었다. 맥가이버의 주인공 리처드 딘 앤더슨과 영어로 인터뷰를 하는 게 내 꿈이었다. 당시엔 모든 외화 시리즈들이 더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나에겐 영어란 공부가 아니었다. 영어를 학습하는 과정이 재미나긴 했지만 문법공부가 아닌 말하는 영어 공부가 더 좋았다. 운이 좋게도 중학교 때 영어를 흥미롭게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을 만난 건 행운이기도 하다. 영문학을 전공을 하기도 했지만 실제 외국인 앞에서는 한마디도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 첫 번째 직장에서 슬로바키아에서 온 실비아라는 친구를 알게 됐다. 그녀는 중고등학교를 미국에서 다녀서인지 완벽한 영어를 구사했다. 같이 시간을 보낼 때면 내가 말한 잘못된 표현을 고쳐줬다. 그러면서 영어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봤던 경험에 비춰볼 때 한국에서 영어가 하나의 언어로 다가가지 않는 듯하다. 그저 점수를 잘 받기 위한 과목 중에 하나로 인식되어 있다. 내 아이들에겐 영어가 다른 나라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받아들여지길 바랐다. 그 점에서는 남편도 같은 의견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과 다른 나라로 여행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영어가 노출이 되었다. 부모가 사람들과 영어로 대화를 하니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듯이 아이들도 그대로 흡수를 하는 듯했다.
우리가 국제커플 가족이라서 그런지 주위엔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 수시로 그 사람들과 만나고 파티를 한다. 프랑스, 미국, 독일 등 그 사람들과 교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듯하다. 가끔 집안에서 영어로 아이들에게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한국에 살고 있으니 당연히 한국말을 한다. 아빠가 독일 사람이니 독일말을 한다. 외국인과 만날 기회가 많아 영어가 낯설지 않다. 하지만 세 가지 언어를 하면서 어려운 점도 있다. 슬아가 4살 때 그런 말을 했었다.
"엄마! 아빠가 책 읽어주는 거 그만했으면 좋겠어. 독일어 힘들어."
그 해에 독일에 가족들을 만나러 갔다. 아빠의 친구들을 만나고 가족들을 만나면서 슬아는 동기부여를 받은 듯했다. 하루는 하루 종일 독일어만 해서 깜짝 놀랐다. 그 이후부터는 독일어에 대한 불평을 하지 않는다. 한스가 아이들에게 독일말을 계속하니 나도 이제 좀 듣기가 익숙해졌다. 하지만 난 독일말을 못 한다. 그저 상황을 보며 대략 하는 말을 짐작할 뿐이다. 남편과 아이들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해 여러 번 낭패가 생긴 적도 있다. 매해 목표가 독일어 공부인 나를 반성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