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한 번도 그들을 어르신이라고 부른 적 없다.
영어 문화가 좋은 이유는 이름을 마음껏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요양병원의 환자들, 요양원의 입소자들을 어르신이라고 부르는데 난 이게 정말 싫다.
내가 영국 요양병원의 입소노인을 떠올리며 쓴 글을 보면 전부 반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면 영어로 부를 때, 생각할 때 전부 반말모드이기 때문이다. 반말이라고 존중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뇌가 친구로 인지한다는 말이다.
Would you like a cup of tea? Mary라고 한다고 해서 한글로 ‘차를 드시겠어요. 어르신’이라고 번역하지 않거니와 이 경어는 꼬마 손님에게든 노인에게든 모두 적용되는 표현이다. 내 머릿속에는 존중을 담아, ‘메리, 차 한잔 하겠어?’라고 떠올린다. 아니면 에프터눈티 시간에 지금은 내가 waitrase 역할을 맡고 있고 대접하는 시간이니까 하고 내 포지션을 잠시 바꾼 걸로 인식한다.
요양보호사 교육 중에 그들에게 be a friender이라는 내용이 있다. be a friend라고 진짜 친구가 되어라라고 하지 않고 friender 이 되어라고 가르친다. 나는 이 말을 그들이 친구로 느낄 수 있게끔 내가 노력해서 친구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내가 그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깨달은 것은 내가 노력하면 그들이 모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노력하는 만큼 그들은 보답을 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친구도 동료들도 모르는 내 마음을 알아주기도 했다. 자주 나를 까먹고 처음 본 사람처럼, 정 없이 남한테 하듯이 대하곤 했지만, 어느 컨디션 좋은 날 전하는 진심 어린 메시지는 한 달에 한 번, 아니 일 년에 한 번이어도 충분했다. 내가 아시아에서 온 마음 따뜻하고 친절한 소녀라는 것을 인지하고, 그래서 좋고 진심으로 대해줘서 자기를 위해서 일해줘서 고맙다라고 말해주었을 때 정말 행복했다. 최상의 보상이자 보람이었다.
어르신이라고 부르고 어르신을 존중하는 마음으로만 일했다면 이렇게 기쁘지 않았을 것 같다. 외국에서 마음 기댈 곳 없고 힘든데 때때로 나를 친구처럼 손녀처럼 가족처럼 대해주었다. 돌아보면 정말 내가 정신적으로 의지를 많이 했던 것 같다. 가끔 내가 울적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무슨일 있냐며 말해보라고 ‘우린친구잖아!’ 라고 어깨끼리 툭 부딪치며 걱정어린 미소로 말을 걸어줄때면 울컥하기도 하고 수다쟁이로 변신해서 개인적인 일을 쏟아내기도 했다. 눈을 반짝이며 공감히면서 내 얘기를 들어주었을 때 너무 고맙고 가슴 한 켠이 찡했다. 진짜 오랜 친구처럼 따뜻하고 진지하게 고민상담을 해주었다. 어르신 같은 벽이 생기는 호칭대신 이름을 부르면서 친근하게 상호작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삶에 매우 중요한 것 같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친해도 선생님, 교수님, 어르신, 심지어 언니, 오빠라고 부르는 만큼 멀어지는 기분이다.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진짜 우정이 시작되는 것 같다. 그러서인지 한국에 돌아와서 새로운 친구를 사귄 적이 없다. 언어의 거리만큼 마음을 주고 받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