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의 치매전문 요양병원의 요양보호사입니다.
요양병원에서 환자의 생활은 자고 씻고 식사하고 여가활동 후 쉬고 건강 체크받는 일상이 반복된다. 그 모든 순간에 직원과의 소통이 이루어진다. 말을 잃어가지만 사람마다 마지막까지 잊지 않는 단어가 다르다. 알버트 할아버지는 ‘엄마’와 ‘비틀즈’여서 신기했다. 엄마를 마지막까지 기억하는 건 누구에게나 납득 가는 일이지만 엄마처럼 가수 비틀즈를 기억하고 마지막까지 부른다는 것이 뭉클했다. 그래서 비틀즈 노래 중 내 최애인 ‘Hey, Jude’를 외워가지고 종종 불러주곤 했었다.
환자들을 돌보며 병원에 있는 내 미래를 그려보았다. 치매에 걸려서 본인이 누군지 까먹었을 때에도 마지막까지 내뱉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 지금부터 연습하고 스스로 세뇌시켜서 호호 할머니가 될 때까지 가져가야겠다고 다짐할 말을 찾아보았다. 고민 끝에 소중한 두 마디를 정했다. 그것은 Yes와 No가 아닌 Thank you와 *uck you이다. ‘Yes와 no’는 단순 의견이지만 ‘고마워와 엿 먹어’는 감정표현이기 때문이다.
‘예스 or 노’는 단지 의견일 뿐이라서 거절당하기 십상이고 환자를 위하는 쪽으로 부드럽게 권유된다. 예를 들면, “식사시간이야. 밥 먹자. 맛있겠지?” 하고 물었을 때 “노”를 외친다 해도, “아니야. 한 번은 맛봐봐. 맛도 좋고 다 너 건강을 위해서야!” 라며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이려 고군분투한다. 그렇지만, 환자가 “ㅃ유” 라고 외치면서 숟가락을 던지면? 다칠 염려도 있고 케어하는 사람도 마음이 상해서 좀 더 쉽게 설득을 포기하고 “너 정말 먹기 싫구나! 기분 나쁠 때 먹으면 속에서도 안 받아. 먹지 마. 그럼.” 이렇게 되곤 한다. 한국처럼 억제대도 없고 ‘강제로’라는 것이 드물다.
내 의견이 확실히 수용되려면 어떤 상황에서든 욕을 하는 게 빠르고, 땡큐는 마법의 언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욕하면 당분간 혼자만의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고(누군가는 이게 소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땡큐”만 잘하면 만나는 사람들 모두의 미소를 보장할 수가 있다. 다른 말은 못 해도 될 것 같다.
누가 돌봄을 제공하느냐에 따라 돌봄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돌봄자의 신념과도 관련이 깊다. 굶주림을 겪어본 세대도 있을 것이고, 아사하는 이웃이 있던 나라에서 이민 온 직원도 있을 것이고, 자식을 키워봤으니 식사 케어에 특출난 전문가 급일 수도 있을 것이다. 병원에서 같은 교육을 받지만, 여러 이유로 옳다고 생각하는 케어 방향은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내가 환자가 되었을 때, 많은 직원들에게 가장 잘 통할 나를 지킬 언어가 필요하다는 생각 했다.
나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연명치료 거부의사를 밝혀두는 것처럼, 그와 동등한 욕구로써 죽기 전까지 콧줄을 꼽지 않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 입맛 없을 때 억지로 먹이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한강 작가님 소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가 식사 거부를 하는 것조차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치매가 걸려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조차 모르는 상태여도 인지능력이 바닥이라고 해도 내 의사표현이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 어떻게든 오래 살기보다, 생명에 위험할지라도 조금이라도 자유롭고 싶다. 그러려면 두 마디면 된다.
Thank you 그리고 F*** you.
-오그라드는 시-
제목: 땡큐 앤 ㅃ유
내가 만약 치매에 걸린다면
적어도 이 두 마디, yes, no 보다 땡큐와 ㅃ큐 할 수 있었으면...
설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발가락이라도 꼼지락거릴 수 있었으면...
소리 내 웃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옅은 미소라도 지을 수 있었으면...
노래는 못해도, 음악에 반응은 할 수 있었으면...
몸은 못 가누어도, 가려운 곳은 스스로 긁을 수 있었으면...
밥은 못 떠먹어도, 목마를 때 목말라 보이고 배고플 때 배고파 보이는 표정은 지을 수 있었으면...
내가 누군지 몰라도, 가끔 부모님과 자식을 알아볼 수 있었으면...
한마디만 더 말할 수 있다면 ‘사랑해’ 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