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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꺽정 Mar 13. 2021

아메리카노, 플리즈

커피를 왜 마셔요?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스타벅스에 갔던 날.

친구가 사다 줘서 테이크아웃으로 먹어봤던 그린티 프라푸치노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어서, 그 친구에게 다시 그걸 먹겠노라 말하고는 패기롭게 주문하러 가서 그린티 라떼를 시켰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귀엽게도 라떼와 프라푸치노의 차이를 몰랐던 그 시절의 나. 픽업대에 준비된 그린티 라떼를 보고 의아했지만 일단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들었고, 친구의 물음에도 태연하게 답했다.


"너 그때 먹었던 거 먹는다면서?"

"아, 갑자기 이게 먹고 싶어서"


프라푸치노를 미처 몰랐다는 멋쩍어서 졸지에 거짓말을 해버린 나였다. 어쨌거나 이 기억의 요는 예전의 나는 아메리카노는 돈을 내고 고통을 받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할 만큼 카페에 가면 모쪼록 달고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진 사람이었다.




물론, 그 달고 맛있는 음료를 선호하는 습성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한 모금 쫙 빨면, 당이 확 차오르는 그런 부덕한 음료들만 마셔댔다.


그리고 대학교에 가면서 예전보다는 생활리듬이 불규칙해지며 조금씩 조금씩 카페인에 대한 의존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스무디, 아이스초코 같은 음료에서 바닐라라떼나 카페모카처럼 달달한 커피 쪽으로 선호가 옮겨 붙었다. 가장 좋아하는 음료는 캬라멜 마끼아또! 이름도 어쩐지 귀엽고, 위에 뿌려주는 캬라멜 드리즐도 좋았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카페에 일상적으로 가지 않았고, 커피가 없어도 커피가 너무너무 마시고 싶다거나 하는 금단증상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그냥 친구들과 카페에 가서 잔뜩 수다 떨면서 한 잔씩 즐기는 정도였다.


같이 카페에 가는 친구들이 아메리카노를 마시면 "그거 왜 먹어?"라거나 "그게 맛있어?"라는 등, 정말 순수한 궁금증에서 물어보곤 했다. 쓰고, 시꺼멓고, 거기다 가격도 맛있는 다른 것들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그걸 왜 먹는 거야!





이런 커피 의존도는 사회에 발을 살짝씩 담그면서 수직 상승했다. 직장인들은 점심을 먹고 나면 커피를 마시는 루틴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엄청난 발견이었다!), 그 트렌드에 올라탄 멋진 직장인이 되기 위해 나도 열심히 노력했다.


그리고, 밥 먹은 뒤에 단 커피를 먹는 것은 어쩐지 쉽지 않은 일이라 그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아메리카노의 매력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충분한 카페인에, 마시고 바로 책상 앞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려도 속이 더부룩하지 않고, 쓴 줄만 알았는데 나름 고소하기도, 때로는 시큼하기도, 다양한 풍미가 있는 커피라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이런 매력들을 점점 알아채며 퐁당 빠지기까지는 그리 오래지 않았다.


회사에 다니는 기간이 길어지고,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커피 수혈보다 더 공감 가는 단어는 없었고, 이상하게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거나, 피곤한 날은 어김없이 커피를 마시지 않은 날이라는 걸 깨달았다.


팍팍하고 뻑뻑한 목 막히는 스콘 같은 일상에, 한 방울 단비 같은 아메리카노 한 모금.


카페에 가려면 30분을 걸어가야 해서 왕복 1시간의 노력이 필요한 외가댁에 가서도 오아시스를 찾는 사막 위의 여행자처럼 비척거리며 논밭을 지나 커피 한 잔을 쟁취해오는 이 시대의 진정한 직장인이 되었다.




이제 커피는,

아메리카노는,

나에게 카페 메뉴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아침에 출근할 때 손에 들린 아메리카노 한 잔은 고단할지도 모르는 하루를 미리 보상해주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며, 점심을 먹고 쫍쫍 들이키는 한 잔은 오후에도 잘해보자며 스스로의 어깨를 두드리는 응원이며,

여기저기 치이고 짓눌렸던 하루에는 그래도 한 숨 돌리라며 억지로라도 만들어주는 여유이자,

주말 아침의 한 잔은 가장 충만하게 즐기는 행복이 된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가끔 하는 말처럼 아메리카노에게도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처음 만났을 때는 너랑 이렇게 친해질 줄 몰랐어"


나의 일상의 기쁨이 된 아메리카노 한 잔.

그래서 오늘도 아메리카노, 플리즈.


Americano, pl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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