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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꺽정 Jun 09. 2021

세상의 볼륨이 작아진 우리 강아지에게

댕댕아, 우리 마음 보이지?



우리 할미개는 14살이다.


웬만한 강아지 모임에서는 나이로 밀리는 법이 거의 없고,

동물 병원에서도, 애견 동반 식당에서도 뭇 하룻강아지들의 공경을 받을 만큼 큰 어른이 되었다.


할머니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을 만큼 여전히 우리 눈에는 엄살쟁이 아기강아지지만, 그래도 자연의 섭리라는 것이 비켜나갈 수는 없기에 노화의 흔적이 하나 둘 쌓여간다.


그런 흔적들이 곳곳에 놓여있는 돌부리처럼 마음을 덜컥, 덜컥 걸리게 하곤 한다. 물론 처음에는 조금 상심하지만, 대개는 곧 할미개를 껴안고 떠나는 그날까지 행복하게 해 주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된다.




최근엔 할미개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원래도 무던한 성격이어서 소리에 그리 예민한 편은 아니었지만, 현관을 들어서도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경우가 많고, 나쁜 짓을 하고 있을 때 천둥처럼 이름을 부르면 흠칫 놀라서 멈추곤 했었는데, 이제는 끄떡없다.


일부러 저~멀리서 불러보기도 하고, 하이톤으로 "간식 줄까?"를 시전 해보지만, 때로는 반응을 하고, 또 때로는 반응이 없어서 처음에는 언제나처럼 무시하는 건 줄 알았는데, 듣는 힘이 많이 쇠하였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인정해가고 있는 요즘이다.


할미개가 자기를 부르는 우리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아서 우리의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우리 목소리가 듣고 싶은데 아무것도 안 들려서 무서워하면 어쩌지,


이런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못내 미안해지고 마는 부족한 나머지 가족들이다.






며칠 전, 동생이 할미개가 밥 먹을 시간에 맞춰서 핑크색 숟가락을 꺼내 들었다.


밥에 영양제를 섞어줄 때 쓰는 할미개 전용 숟가락.

그 숟가락을 뽐내듯이 할미개 앞에 가서 치켜드니 언제 졸렸냐는 듯 용맹하게 짖어대는 할미개

그렇게 알아듣는 게 너무 똘똘하고 귀여워서 웃음이 절로 났다.


동생이 할미개가 냠냠 저녁밥을 먹는 걸 보고 옆에 앉아서 나에게 말했다.


언니. 나 요즘에 제스처로 새로운 말을 가르치고 있어.

     핑크색 숟가락 꺼내면 밥이고, 달리는 몸짓은 산책,

     앞으로 더 많이 가르쳐줘야지!

     그래도 숟가락은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그때, 마음에서 차오르는 잔잔한 기특함이란,


우리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할미개는 실망하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조금은 불편해진 자신의 몸에 새로운 방법으로 적응해가고 있었나 보다.





할미개의 세상이 조금은 조용해졌지만 그것으로 또 괜찮다.


난데없는 벨소리나 노크소리에 화들짝 놀라지 않아도 되고, 산책길에 시끄러운 경적소리에 움츠러들지 않아도 되고,

심장이 좋지 않아서 놀라는 게 좋지 않은 할미개에게 오히려 세상의 볼륨의 조금 작아진 게 낫다고 위안을 삼아 본다.


언니들의 목소리가 조금은 희미하게 들려도, 들리지 않아도,

언제든 그 사랑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도록 힘껏 껴안아줄게.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미개는 옆에서 코까지 골며 도로롱 도로롱 꿀잠을 주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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