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믹- 키라의 보이프렌드 데님 팬츠
공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소녀에게 의료센터 위치를 물은 카시노 레이. 약도를 그려 주고 재빨리 달아나 버려 고맙다는 인사도 못 하고 헤어진다. 레이는 개학식날 결석 후 처음 등교한 고등학교 2학년 교실에서 약도를 그려줬던 소녀를 발견한다. 출석 체크로 알게 된 이름은 아소 키라,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지만 대답은커녕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모습에 화가 난다.
그림만 그리며 교실에서 홀로 지내는 내성적인 아이로 알려진 키라에게 남자 공포증이 있을 거란 얘길 들은 레이는 왠지 모르게 신경 쓰여 말을 걸기 시작한다. 레이가 약도 뒷면에 그려진 그림을 칭찬하며 전한 소감에서 키라는 그의 진심을 느낀다. 소문난 플레이보이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불량학생으로 생각해 그를 싫어했지만 솔직하게 다가오는 모습에 순수함을 느끼고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다.
방과 후 미술실에 가려는 키라에게 레이는 내기 농구에 필요한 돈과 머리끈을 빌려간다. 그림을 그리고 있던 키라는 갑자기 뒤에서 성희롱 하는 남자 교사에 놀라 경직되는데, 때마침 나타난 레이의 도움으로 위험에서 벗어난다. 키라를 진정시킨 레이는 도화지에 그려진 석고 데생을 보고 감탄하고 그림의 모델이 된 석고상을 바라본다. '마르스(MARS)'라는 이름을 가진 전쟁의 신, 그의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외모에 이끌려 석고상에 입을 맞춘다.
마르스 상에 키스하던 모습에 매료된 키라는 레이에게 그림의 모델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고 둘이 함께 미술실 있는 모습이 교내에 알려진다. 키라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레이의 모습은 평소 그를 좋아하던 하루미에게 분노를 사게 되고 주제를 알라며 심한 괴롭힘을 당한다. 폭력의 강도를 높여 키라를 압박하지만 굴복하지 않고 레이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는 모습에 위협을 멈춘다. 키라를 구하러 간 레이는 다치지 않은 모습에 안도하며 자신의 마음이 우정이 아닌 사랑임을 자각한다.
사랑에 서툴렀던 두 사람은 같이하는 시간 속에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면서 공허했던 마음이 채워져 간다. 살아가는 진정한 기쁨을 느끼게 된 레이와 키라는 함께 의지하고 나아가면서 각각의 아픔에 짓눌렸던 삶의 고통에서 해방된다.
1996년에서 2000년까지 연재된 소료 후유미 작가의 일본 소녀만화 <MARS>. 수정 같이 빛나는 커다란 눈과 미형의 그림체가 아름답다. 깔끔한 펜선이 돋보이게 약간의 필압만을 사용하여 군더더기 없는 외관을 보여준다. 캐릭터의 이상적인 신체비율을 탄탄한 형태력으로 뒷받침 한 뛰어난 작화 실력은 연재 당시 배경 연도인 1990년대 후반 유행 했던 패션을 등장인물들이 멋지게 소화하게 만들었다.
인물의 시선을 통한 묘사와 연출에 탁월한 장점을 지닌 작가는 심플한 컷의 분할로 감각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사각의 프레임으로 대표되는 만화 표현의 틀을 수직과 수평은 물론 사선과 대각선을 적재적소에 사용하여 개방과 폐쇄를 자유롭게 넘나 든다. 작게 여러 개로 칸을 쪼개거나 대담하게 와이드 한 컷으로 세련된 페이스를 완결까지 잘 이끌어 갔다. 흑백 만화에서 입체감과 감정표현을 살리기 위해 사용하는 스크린톤조차 과하지 않고 현대적인 느낌으로 다가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촌스럽지 않다.
단순히 예쁘고 잘생긴 소년 소녀가 만나 연애하는 알콩달콩한 이야기가 아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그 안에 각기 다른 아픔을 갖고 있음을 말한다. 삶을 망가 뜨린 개인의 비극은 어디서 초래되고 인생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는가. 아픔에 잠식당한 인간은 어떻게 스스로를 파괴하고 주위를 형성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레이는 동생의 죽음과 출생의 비밀로 키라는 중학시절 강간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고 살아간다. 그들이 아픔을 잊기 위해 돌파구로 찾은 것은 오토바이 레이싱과 그림 그리기였다. 신호등과 장애물도 없이 길게 뻗은 서킷에서 질주하고, 도화지와 캔버스에 손이 가는 데로 자유롭게 그려진 그림은 과거의 어두운 고통 아래 현재의 빛과 연결된 유일한 통로였다. 오직 그 안에서만 숨통이 트이는 나를 보호한 세계는 내면을 표현하는 도구로 장래의 꿈인 동시에 마음속에 희망을 놓치지 않게 해 주었다.
레이와 키라가 서로를 마주하며 아픔을 알게 된 것은 인간의 어두운 내면이 형체화 한 인물 키리시마 마키오의 등장을 통해서다. 그는 과거 발작하듯 예민하고 거칠게 날뛰던 레이를 동경하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극악무도함을 가졌다. 가냘프고 예쁜 외모와 미성년자인 나이를 이용하여 계략을 꾸미는 영악한 남고생으로 본인과 동일한 성향이라 느낀 대상이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을 파괴하려 한다. 레이를 다시 예전과 같은 존재로 되돌리려 하지만 키라가 있어 무너지지 않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심연에 감춰진 상처를 들춰내 트라우마를 끄집어낸다.
마키오와 엮이며 겪는 일들로 인해 두 사람은 자신의 이면(裏面)을 제대로 보게 된다. '사랑'이 중요한 모토인 소녀만화에서 마땅히 남녀 주인공은 깨끗하고 정의로운 심성의 소유자이지만 그들 역시 드러내지 않았을 뿐 잔인한 어둠이 공존하는 평범한 인간임을 말한다. 타인을 해하는 것은 나쁜 짓이고 해선 안될 일이란 걸 알지만 자신이 피해자인 상황에서 가해자에게 동일한 고통이나 더한 아픔으로 되갚아 처단하고 싶은 양가적 감정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중적인 양면성이 발현되는 발단을 겪고 하나의 선택으로 인해 선과 악으로 양분되는 갈등에서 만난 캐릭터의 본능적으로 솔직하고 서늘한 행동은 이 만화가 속해있는 장르의 특성상 매우 파격적인 선택이라 하겠다.
어머니의 병환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생기자 키라를 강간한 계부의 집에서 다시 모녀가 살게 됐을 때, 독자로서 거부감과 공포가 몰려 오지만 실제 피해자와 가해자가 한 공간에 사는 믿고 싶지 않은 사회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했다고 생각한다. 거북함과 역겨운 감정마저도 금전적인 현실 앞에서 묵인되는 이차적 문제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모습은 실제에 대한 깊은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이 다시 벌어졌을 때 키라는 레이를 찾아갔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믿을 수 있는 이가 사는 곳. 낡고 허름한 공간은 한 사람의 존재로 인해 안심하고 기댈 수 있는 안전지대가 된다. 과거의 아픈 기억을 씻겨 버리듯 샤워를 하고 레이의 티셔츠와 데님 팬츠로 갈아입은 키라. 그의 체취가 묻은 옷을 입는 순간, 놀라서 두려웠던 마음에 안도감을 덧 씌운다. 친숙한 촉감은 피부에 닿아 마음과 접속해 키라의 내면을 보호하는 방호복이 되었다. 그것은 특수한 소재로 딱딱하고 겹겹이 둘러 싸여 만든 견고한 벽이 아니다. 단지 하나의 옷, 나를 사랑하는 타인이 나를 위해 내어 준 고마운 가슴의 한 조각이다.
흔히 '보이프렌드핏'이라 불리는 루스한 실루엣의 여성용 데님이 있지만, 키라는 리얼(real) 보이프렌드 청바지를 입었다. 키 187cm에 큰 키와 호리호리 한 체형의 레이는 긴 다리로 인해 바지 기장이 길다. 스트레이트 핏의 남성용 청바지를 작고 마른 체격의 키라가 입어 밑단을 넓게 잡아 턴업(turn-up)하고 다리 길이에 맞게 기장을 맞췄다. 접힌 밑단은 *아웃심(outseam)의 안쪽이 노출되어 시접이 **가름솔 된 11자의 직선 모양이 도드라져 너무나 귀여운 패션 포인트가 되었다. 양 옆으로 갈라진 시접은 컷팅된 끝부분을 오바로크 처리하여 올 풀림을 막아 봉제하며, 디자인 의도에 따라 몸판의 실과 동일하거나 다른 컬러를 사용하여 바지의 아름다운 묘미를 드러 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르바이트와 평상시 등교에도 청바지를 즐겨 입는 레이의 습관 덕에 데님 원단은 뻣뻣함이 사라질 정도의 마모가 된 표면을 갖고 있는 상태다. 아담한 키라가 착용하자 부드럽고 넉넉한 핏을 만들어 주었다. 여성 보다 앞밑위 각도가 큰 남성 바지의 특징은 여유 있는 품을 만들어 그녀가 청바지를 파자마처럼 편안한 착용감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아웃심(outseam)- 바지 외각의 바깥 봉제선
**가름솔- 두 폭을 맞대고 꿰맨 줄을 중심으로 하여 시접을 양쪽으로 갈라 붙인 솔기
과거의 상처가 만든 고통은 보이지 않는 사슬로 인간의 몸과 정신을 결박하고 아픔을 준다. 해악의 근원이 없던 일이 되진 않지만 극복해 내는 방법을 찾아 치유될 수 있다. 다친 피부에 세포가 조직을 재생시켜 다시 새 살이 돋아나는 것처럼 아픔은 없애고 새롭게 태어나는 마음의 회복도 가능한 것이다.
사랑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고 두려운 공포마저 응시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텅 빈 존재라 믿었던 레이에게 고유한 색을 느끼고 따듯하게 바라봐준 키라. 상처 입은 몸과 마음으로 움츠린 현실 안에 갇혀 있던 키라를 일으켜 감싸 안은 레이. 인생이라는 전장(戰場)에서 발견한 사랑이 내 안에 잠든 군신(軍神)을 깨워 아픔을 멸망시켰다. 누구나 마음속에 내면을 지키는 군신이 있다. 내 안에 군신을 부르는 방법은 영험한 주술이나 부적도 필요치 않다. 단지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진심이 통하는 용기에 반응할 뿐이다.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신의 구원이 아니라 그것을 멸하고 보다 강력한 행복을 스스로가 마땅히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했다. 이해득실이 무엇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진실한 사랑, 나를 위해 움직이는 순도 높은 그 결정체가 사람을 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