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통장이 아니라 선택에서 부유해진다



내가 부유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통장 잔고를 확인할 때가 아니다.

퇴근길 편의점에서 피자를 고를 때다.


비싼 걸 살 수 있어서가 아니라,

굳이 계산하지 않고

내 기준으로 고를 수 있을 때.


그 순간 나는

아, 지금 나는 괜찮은 삶 안에 있구나

하고 조용히 느낀다.




예전에 도쿄에 살던 시절이 있다.

일이 늘 늦게 끝났고,

장보기는 주로 편의점에서 했다.


내가 살던 곳은 나카메구로.

일본에서 중상층 거주지로 꼽히는 동네라

집 근처에 고급 슈퍼마켓이 세 곳이나 있었다.


가끔 퇴근길에

그중의 한 곳이라도 열려 있으면

괜히 마음이 느슨해져 이것저것 담았다.

그날만큼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고 싶은 것” 위주로.


그 시절,

일본어 공부 겸 텔레비전을 틀어두곤 했는데

유독 자주 보게 된 드라마가 하나 있었다.


젊은 나이에 두 아이를 키우는

가난한 싱글맘이 주인공인 이야기였다.


어느 날, 친구가 그녀에게 말한다.

“오늘은 내가 아이들 봐줄게.

가끔은 와인 한 잔 하면서 쉬어도 돼.”


그날 밤, 주인공은 슈퍼에서 와인 코너 앞에 선다.

싸구려 와인을 집었다가, 내려놓고,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한 채 지나간다.


다시, 내 손에 들린 와인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고급 와인은 아니고,

또 특별한 날은 아니었지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와인을 고르고 있었다.


그 순간,

그 드라마 속 장면과 겹쳐지며

피곤한 타향살이였지만,

나는 조용히 내 삶의 부유함에 감사했다.



일본의 편의점은 정말 만능이다.

특히 나는 세븐일레븐을 좋아한다.


요즘은 거의 집에서 해 먹지만

가끔 들르면 꼭 사는 게 있다.

냉동 피자.


가격은 638엔(세금 별도).

맛있다. 충분히.


얼마 전, 고급 슈퍼에 갈 일이 있었는데

후쿠오카에서 꽤 유명한 이탈리안 가게가

직접 만든 냉동 피자를 팔고 있었다.


가격은 980엔(세금 별도).


갑자기 비교해 보고 싶어졌다.

살짝 설레는 마음으로 둘 다 먹어봤다.


결과는?

편의점 피자 승.


이럴 때도 나는 이상하게 부유해진다.


왜냐하면

나는 별 부담 없이 둘 다 살 수 있고,

가격이 아니라 맛으로 판단했고,


이제는 고급 냉동 피자를

“비싸서” 안 사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편의점 피자를

“싸서” 고르지도 않는다.


비교해 본 경험이 생기면

선택은 단순해진다.



요즘 내가 느끼는 부유함은

돈의 액수와는 조금 다르다.


사볼 수 있고

비교해 볼 수 있고

내 기준으로 고를 수 있는 상태


그게 나에게는 부유함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런 작고 조용한 부유한 경험들을

의식적으로 많이 쌓아두고 싶다.


혹시 언젠가

덜 부유해질 때가 오더라도,

혹은 훨씬 더 부유해진다 해도,


이 경험치들은

나를 더 단순하고 단단하게 만들 것이고,


그 자체로

내 부유함의 근간이자 자산이 되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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