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부러 울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무방비 상태에서 눈물이 흘릴 때는 제외하고 우는 것을 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우연히 슬퍼할 것을 찾던 내가 이제는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붙잡는 이성의 끈을 자각한 순간 직감했다.
이제 나에게 눈물이 떠났다는 것을... 이제 흘릴 만큼 흘렸다는 것을...
사람들은 각자가 슬픔의 양과 기쁨의 양이 정해져 있을까 아니면 모두 비슷한 분량일까.
어쩌면 모두에게 똑같이 정해져 있는데 어떤 사람은 슬픔을 바라보며 슬퍼하지 않고 싶다며 살고, 어떤 사람은 기쁨만 있는 삶을 살고 싶다며 슬퍼도 기쁨을 보며 살기로 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 바로 여기 이곳이었음을
모두가 각자의 자유의지이며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다. 그것에 결과도 물론 각자의 몫이다.
어쩌면 이제 그럴 나이가 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나이가 들었다고 그렇게 살지는 않으니까,
지금은 그때만큼 슬프지 않고 현재는 어느 정도 전후좌우가 예상이 되어 너무 막막하지도 않고, 시간이 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멀쩡해지기도 해왔던걸 여러 번 수백 번 아니 수천번쯤 겪어왔기에 약간의 요령 같은 지혜가 생겼다고나 할까...
그래도 오랜만에 기도하는 시간에는 눈물이 나왔던 시간을 보냈으며 인간이 아닌 신에게 마주하며 간절함을 전달하기도 한다. 이 순간은 오히려 감격의 눈물이니 다른 차원이긴 하다.
이렇게 여기까지 모든 문제들을 헤집고 나와 하나씩 하나씩 점점 더 해결되며 나아지며 어딘가로 가까워지며 가고 있었는데 거기가 바로 여기 이곳이었음에 나는 감탄하고 감격하고 감사한다. 그래... 바로 이곳이다.
# 나만의 예술 같은 인생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 어쩌면 우리가 쉽게 무언가를 이룰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아름다운 진통과 역사의 스토리가 인생 내내 눈감을 때까지 질리지 않는 나만의 보석이 되기 때문이 아닌가. 바로 어떤 잊을 수 없는 사랑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복을 받은 사람인가. 눈을 감을 때 후회하지 않을 것이고, 노후가 허망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수많은 경험으로 인한 깨달음이 성숙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 무엇인가의 진흙탕 같은 삶 속에서 진주처럼 빛나는 보석을 알아보는 눈을 선물 받으며, 그래서 그것을 채취하며 잘 간직하며 챕터를 만들어가는, 누구도 같은 수 없는 나만의 것들의 히스토리.
다시 똑같을 수 없는 각자의 인생의 사연들이 만들어 낸, 아름답고 처절하며 찬란한 나의 역사라는 것을 말이다. 어쩠든 내내 눈물을 흘리고 다녔던 나는 지난 추억 속에서나 기억나는 것으로 지금은 눈물을 불러내지 않는 내가 되어있다.
# 행복 분량의 측면 분석
순간순간 너무 좋아서 팔짝팔짝 뛰고 싶을 때가 가끔 있지만 나이가 가끔 현타 오게 하여 마음속으로만 하늘 높이 뛰었다. 현재 오늘은 아무 걱정 없는 시간이다. 몇 달 후에 일을 나는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알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시간이 얼마나 불행을 자조한 일이었는지를 알고 난 후로 내일 일은 내일 대응하는 것이, 나의 삶의 가치 기준에서 봤을 때 행복 분량의 측면에서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몇 달 후에 상황이 어떻게 다가올지 아무도 모르는데 나의 예측은, 생존본능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인자가 선두에 서려하기 때문에 결국 부정적인 것이 기선을 제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예술을 완전히 무시하고 짓밟기 때문에 최대한 그 본능을 제어하려고 한다. 쓸데없이 나올 때가 너무 많은 무의식의 종류다.
지금의 이 이루어진 행복한 삶을 지켜야 할 의무가 내게 있다. 그것은 오직 바로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불행은 누구나 줄 수 있지만 행복은 나만이 줄 수 있다. 오직 바로 나만이 말이다.
# 걱정보다 믿음이 확률적으로 행복하다
나는 이성과 걱정보다는 믿음을 선택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았다. 세 가지의 수를 말이다.
한 가지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현재의 상황에 대하여 문제들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적인 것도 내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이성적의 경계에 서있다가 어느새 부정적으로 쏠림 현상을 여러 번 목격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사는 것 자체가 문제다.
걱정은 모든 일을 마치고 자유시간에 발생한다. 곧 현장이 아니며 무대에서 내려온 후 라는 것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현장이다. 무대 뒤에서 연습을 잘하더라도 무대 위에서 떨리거나 대사를 잊으면 아웃인 거다.
그렇다면 걱정은 사실 의미가 없는 것이다. 무대 위에 서있는 순간에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객관적으로 준비도 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도 세워야 한다. 사실 이것들은 스트레스를 주거나 심각하게 하지는 않는다. 단지 이런 실무적인 것은 하면 되는 것일 뿐이다. 지금 당장 잘 안 되는 대안은 아마 지금은 할 수 없는 경지의 시간이 필요한 부분일 거다. 한낱 관념일 뿐인 걱정이란 감정이 불필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 믿음은 100%가 기준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긍정하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을 70%를 갖는 것이 아니라 100%의 믿음이어야 하는 것이다. 30%의 불신이 나머지 70%를 삼킬 만큼 불신의 부정성은 긍정성의 위력보다 훨씬 힘이 세다.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아 예를 들어 믿음으로 편안하게 지내며 삶을 살았는데 잘 되지 않았을 수 있다. 반대로 믿어지지 않아 불안으로 삶을 살아서 잘 되지 않았을 수 있다. 해피엔딩은 어차피 좋은 거니 논외로 하고 중요한 것은 최악의 경우 무엇이 최선인가라는 것이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전전긍긍 하며 한 사람은 살 것이고 , 또 한 사람은 약간 살짝 미친 사람처럼 살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누가 인생을 행복하게 살았는가.
둘 중에 편안하게 지내다가 잘 안될 수 있는 상황이 낫다는 것이다. 인생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 열심히 하는 모든 사람이 다 성공하는 세상은 아니니까 말이다.
# 100% 완전함에 이르기 위하여
불안한 상태에서 일을 하면 일은 더 잘못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우리는 모두 믿음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을 가장 최선으로 이끌고 가장 최선으로 행복하게 하며 미래에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진짜 문제는 믿음을 가질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100%의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100%의 믿음은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과 순수함에서 가장 성공확률이 높다. 계산하는 순간 믿음은 신기루 처럼 사라진다. 계산하지 않으면 손해 볼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은 사랑으로 마음이 움직인다. 논리로는 사리분별을 할 뿐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믿어주는 마음이다.
이미 세상은 계산이 시스템화 돼있고, 암묵적인 사회성이 있기 때문에 손해 볼 일은 뭐 사기 같은 경우가 아니면 크게 당하지는 않는다. 좀 더 나아가면 사기는 욕심이 허황되지만 않게 살면 미혹되지 않는다. 그리고 좀 손해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나중에 더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아마 손해 좀 보며 사는 100%의 믿음이 훨씬 더 큰 사람이 되어 있는 자신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경지는 아무나 오를 수 없기 때문에 독보적 존재가 된다. 그 존재가 되는 것만으로도 앞으로의 인생에 청사진이 펼쳐지는 것이다.
# 믿음을 가지면 즐기는 것은 옵션
결국 결과는 인간이 좌지우지할 수 없지만, 과정은 내가 주도할 수 있는 것이므로 가장 행복한 것으로 선택하겠다는 것이고, 미래에 대한 낙관을 가지고 긍정으로 편안하게 지내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거참 즐기며 잘 살았다 라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역시 나는 감성적이며 낭만적이며 어느 정도 현실적일 줄은 알았는데 그 정도도 아닌 것 같다. 그냥 이상주의자이다.
행복한 이상주의자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열심히 하는 것과 즐기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즐기는 것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거나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창작가에게는 즐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뇌의 자극일 것이고 믿음이 전제되어 편안함 때문에 도파민을 비롯한 호르몬이 나를 여유 있게 할 것이고 미래에 대한 강박이 없음이 나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열심히만 하는 것은 능률이나 행복지수에 그다지 좋은 방식이 아니다.
# 2미터쯤 거리두기
울지 않는다는 것은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상황에 빠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러 번 글을 쓰는 말이지만이 세상에 빠지서 허우적대며 살고 싶지 않다. 더 이상은 말이다. 그저 한 2미터쯤 거리를 두고 싶다. 부분을 보지 않고 전체를 보는 눈을 갖고 싶다. 또 상황에 대처할 최대한 빠르고 빠른 판단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상황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느긋하게 최대한 여유 있게 즐기는 상태에서 바로 보는 것만큼 최고의 판단을 할 수 있는 조건은 없다.
모든 실수는 목표를 향한 열망이 오버되어 조급함이 됨으로써 여유를 잃어버렸을 때 발생한다.
나의 행복을 위해 슬퍼할 권리는 내게 없다.
이미 너무 많은 슬픔을 느끼며 통곡의 세월을 보내왔으며, 성숙하게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은 효과를 주지 않는다. 에너지가 많지 않은 시기에는 성숙하게 하기보다 좌절하게 시켜버리기에 나쁘다.
이젠 그 단계는 넘어서야 한다. 인간의 삶에 지나는 희로애락을 넘어 삶 전반의 베이직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베이직은 엔조이며 즐김이다.
# 역시 살아남길 잘했어
몇 년 전 지인이 잔다르크 같은 성향의 느낌이라는 말을 해주셨는데, 잔다르크의 여전사의 삶이 멋져 보였을 때라 묘한 기분이었다. MBTI에서도 잔다르크형이어서 나의 성향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나 역시 잔다르크적 삶을 동경하고 내게 맞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정의를 사랑하며 나의 문제와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사람.
내 전쟁의 대적은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이며 가능성에 1도 점수를 주지 않으려 하는 자아의 부정성이다.
시간이 가면 잔나비의 공연을 보며 글을 쓰던 오늘을, 이 글을 보며 기억할 것이다. 이불을 널어놓은 베란다 너머로 공사 중인 크레인이 떠있다. 일상의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매일매일 한 번도 똑같지 않게 창조되는 저 신비롭고 예술적인 구름들과 현실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저 높고 먼 우주를 가리고 있는 하늘의 멋진 풍경을 보며 역시 살아있길 잘했어라고 화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