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예술로 만들기 위하여

by miel





# 사차원 인간



나는 삶을 낭만적인 관점에서 보고 싶어 하며 현실적인 이상주의자이다. 인생을 고차원적인 관점으로 살고 싶어 한다. 멋진 인생으로 만들어 가고 싶다. 사고하는 인간, 사색하는 인간, 나만의 것들을 발현하고 싶어 한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냥 나 자신이 내 인생을 즐기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자아에 무한한 흥미를 느낀다. 무엇을 그리 쓰고 싶어 하는지도 궁금하고 인간의 삶 자체에도 호기심이 많다.


현상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는 것을 통하여 어떤 일관성을 도출하면 이것이 지혜가 되어간다는 것을 느낀다. 대부분의 문제 해결은 본질을 알아내는 것에서 최대치의 좋은 대안이 나오기 때문이다. 지혜는 나를 단순하게 하고 정돈되게 한다. 실수를 줄이고 어떤 통찰을 갖게 한다. 그 개운한 기분이 너무 좋은 것이다.




# 물질적 영역은 편리함은 준다 행복은 주지 않는다



일상적 삶을 사는 것은 지루하고 답답하다는 생각을 늘 해왔으며 그 이유는 나의 성향이 내면적 탐구 성향을 다분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사차원 인간 같은 느낌이 들것이다. 그런 나를 내가 인정하기에도 오랜 방황의 시간이 걸렸다. 내 주위에는 나 같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공간. 이 현상과 현실에 그닥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이 현실이라는 현상은 인간을 끝없이 동물적이게 하고 생각이라는 것이 필요 없게 그래서 자아를 소외시킨다. 인간의 고상하고 높은 정신과 영혼을 돈이라는 절대적인 것으로 거침없이 짓밟아 버린다. 단지 수단일 뿐인 것이 목적을 훼손시키는 모습 모순적이며 씁쓸하다.


그로 인해 나는 주위의 어떤 것들에게도 섞이고 싶지 않다. 특히 욕망이라는 것에 섞이고 싶지 않다. 그저 생명을 위해 무관심하지 않고,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무관심 하지 않고 현실에 발을 맞출 뿐이다.

이젠 더이상 외부의 영향을 받고 싶지 않다.




# 관계는 계산이 아니다



물질적 관점으로만 살아가면 계산적인 성향으로 살아가게 되며,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그 이유는 사람은 계산하는 관계에게 마음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동일하다. 사람은 나를 위해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준다. 그것이 인연이 되고 그 인연이 인맥이라는 것이고 그 관계가 내 삶의 힘이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우선 나를 생각해보면 답은 아주 쉽게 나온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중에 계산적인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작금의 시대에는 마음을 나누는 우정, 사랑이 거의 없다. 언제든 만날 준비와 떠날 준비를 하고 계산을 하며 산다. 그러나 그들 모든 인생의 말로는 아무도 진정한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수박 겉핡기를 하다가 인생을 마감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무수히 보아왔다. 계산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더 여유 있는 자신의 것을 내어줄 때 더 큰 것이 온다. 사랑이 오는 것이다. 그 사랑은 굉장히 강한 힘을 갖는다. 내가 가장 힘들 때 대부분의 그 사람은 곁에 있어준다. 또한 우리에게 사람이 가장 절실히 필요한 순간은 힘들 때이다.





# 자아를 발견하는 통로가 차단되었습니다



지금의 시대는 깊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 시각과 청각을 모두 쓰게 하는 영상 콘텐츠는 생각하며 볼 수 없다. 두 기능이 모두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뇌가 일을 할 수 없는 것 같다. 아주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좋다 싫다 기쁘다 기분 나쁘다 정도의 단편적인 감정만 느껴질 뿐이다. 시각을 사용하며 자신의 생각과 비교하며 상상하며 사색하는 책을 사람들은 읽지 않는다.


이 시대의 교육도 사고력을 성장시키지는 않고 주입식만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책을 읽더라도 감상문 정도로 마감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것은 자아와 만난다기 보다 저자의 입장을 지식으로 보았을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아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흘러간다. 이렇게 지식이 대중화된 사회에 철학자가 많지 않다는 것은 바로 그 현상을 반증한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을 인간이게 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은 인간 본성의 내면의 것들을 무시하고 살 수밖에 없었다. 생계의 문제가 그것들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렸기 때문이다. 아마 그래서 인생이 허무하다고 노후의 시기가 되면 너나없이 그런 말들을 가득 채우고 젊은 청춘들은 뭔지 모를 그 어떤 것의 공허감으로 술과 여자와 쾌락으로 인생의 행복을 찾아 헤매었으리라.


지금 역시 우리는 철학을 고물상에 버렸고 세상의 틀을 짜는 이들만이 인문학과 철학의 무시무시한 힘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적어도 언제든 너튜브에서 철학책과 인문학을 접할 수 있다. 그 책들은 모두 내면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우리 인생의 진리는 자신 스스로의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들만 존재한다. 그저 내가 존재하기 위한 수단만이 존재할 뿐이다. 외부에는 목적이 없다. 목적은 내부에만 존재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은 그 사람의 인격과 예술이 된다.




# 자아와 만나는 공간



현실에 집착해 좋아지는 것은 없었다. 돈이 많아져 보기도 했고, 현실만 보고 살아 보기도 했으나 그럴수록 나는 공허하고 또한 악해져 갔다. 선이라는 진리의 브레이크가 없었기 때문이다. 외부에서는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나는 나 자신이 되고 싶다. 자아가 원하는 내가 되고 싶다. 자아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가...

내 자아는 글을 쓰고 싶어 한다는 것. 딱히 쓰고 싶은 것이 없는 데도 글을 쓰고 싶어 한다. 글은 쓸게 있어서 쓰는 게 아니라 쓰고 싶어서 쓰다 보면 써지는 느낌 같은 것이다. 자아와 만나는 통로인 것을 느낀다. 나는 내 자아와 만나고 싶어 글을 쓰는 것이다. 현실에서 자아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이라고 불리는 현상에서 교육되어진 페르소나가 있고 그것이 자아를 지워버리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를 찾는 길을 알기란 도통 쉽지도 않고 쉽게 찾을 수도 없는 아주 복잡한 미로 같은 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아와 분리된 현실에서 느끼는 그 갭이 자아가 상실된 감정이 공허감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 자아를 만나는 길



어떤 것에든 내가 좋아하는 것, 그것을 하면 시간 가는 줄 몰라 약속시간에 늦어버리는 것. 그것을 만나는 것에서 자아를 발견하는 단초가 된다. 자아를 만나는 길은 왜? 라는 물음이 수십 번 들어가고 수백만 들어가고 수천번 들어가면서 찾아내야 겨우 만날 수 있다.


왜 글을 쓰고 싶은가. 글은 무엇을 충족시키는가. 글은 어떤 의미인가. 글에서 무엇을 쓰고 싶은 것인가. 글을 쓰고 무엇이 달라지고 있는가. 어떤 글을 써야 하고 어떤 글을 쓰지 말아야 하는가. 개인에게 글이 어떤 한계가 끝이 있을까. 자신의 모든 경험과 생각이 다 써지고 나면 무엇을 쓸 수 있는가. 우리의 뇌는 과연 무한대일까. 작가로만 살아도 나는 충분히 행복할까. 베스트셀러로 성공하고 싶은 것은 아닌가. 예술로 승화시킨다는 것은 무엇일까. 글과 예술은 무슨 차이인가. 등등 수많은 물음들이 다가오고 지나가면서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어 하는가가 조금씩 조금씩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 킬리만자로의 표범



사람은 저마다 모두 다르다. 완전히 다르다. 겉으로는 모두 똑같이 하루 세끼를 먹고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잠자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인생을 살아가지만 한 명도 똑같은 DNA는 없다. 모두 다른 다양한 우주를 부여받고 태어났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그 우주를 탐색하며 우주가 원하는 삶을 이 세상에서 펼칠 수 있도록, 최대한 내면의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듣어주고 거의 무조건은 그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에서 그 자아를 찾는 길을 진행시켜 주지 않음으로 그 길이 밥을 먹고 살 수 없을 것 같아도 다른 일을 하면서라도 그 길을 찾아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자아를 이 세상에 현실화 시키며 자신이 세상에서 소외되지 않는 삶을 살 수가 있다.

과연 인생은 원래 허무한 것인가...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의 원인은 무엇 때문인가. 인생 속에 나 자신이 살고 있지 않는 느낌이 들어서가 아닐까.


나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정체성이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내면의 진정한 나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서 우리는 그 소외감으로 괴로워 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정체성을 찾아가면서 현실화 시켜가고 있다면 허무하지 않을 것인가...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한계 때문이다.

세상은 모두의 정체성을 현실화시켜주지 않는 경쟁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득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듣고 싶어졌다.




# 꿈을 품고 걸을 때 더 아름다운 걸 알았으면 해



그래도 분명 어느 정도 깊은 허무감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세상에서 어떤 꿈의 완성이 아닌, 꿈 자체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목적과 의미를 둔다면 말이다. 그것이 인생을 사는 데 있어 훨씬 더 행복에 가깝다. 꿈의 완성은 먼 미래에 이루어 지거나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꿈의 완성은 그 자체가 경쟁이라는 현실과 연결점을 갖기 때문에 순수한 자신의 내면의 정체성을 페르소나가 훼손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순수함을 잃어버리는 것은 처음부터가 아니다. 처음이 지나 어려움이나 지루함이 오거나 고난이 왔을 때, 우리는 순수함을 버리고 현실과 타협한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 유약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꾸만 현실을 벗어나 있고 싶다. 그러나 어느 깊은 시골이나 바다로 가고 싶지도 않다. 나는 여기 이 도시에 사람들을 관망하며 진정한 삶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현실은 내게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오히려 인간의 내면이 더욱 흥미롭고 신비스럽다. 내가 찾아낸 나 자신은 세상의 본질, 사람의 내면을 탐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무엇보다 내가 행복한 것은 쓸데없는 것 같은 이야기가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힘들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똑같이 살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가 한심해 했었다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대한다. 자신을 부끄럽게 하고 수치스럽게 하고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그 이데올로기에 말리만 절대 안된다. 불행이 거기에서 시작된다.

지금 나는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결론에 서 있다.

이 확신은 가려져 있던 정체성의 통로가 드러난 기쁨이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내는 이 자유와 해방감이 영혼의 숨을 쉬게 한다.

깊게 내 안에 들어가 고찰하는 이 기분은 시원한 탄산수를 마신 느낌이 들게 한다.

다르게 살아도 괜찮아 민폐만 되지 않으면 이라는 이 허용된 자유, 공간의 팽창감이 비로소 나를 지구라는 행성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방인으로써 인간이 나아갈 수 있는 고차원적인 삶을 꿈꾸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