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앙유치원이라는 팻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린이』에 실렸던 글이나 방정환 선생의 편지글에서 접해보긴 했으나 유치원이라는 단어가 신기했다. 비가 오는 밤인데도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행렬이 계속 이어졌다. 우산을 털며, 복도를 걸어가며 부인들끼리 남자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호칭으로 미루어보건대 소년단체 관계자, 유치원과 보통학교 교원들로 보였다. 자연스레 들리는 말에 미소 짓다가 나는 문득 깨달았다. 놀랍게도 나는 지금 경성 인사동에 와 있고, 두 발로 걷고 있었다. 몸을 꼿꼿하게 한 채 사람들을 뒤따라 강당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지만 나는 마치 초대받은 사람인 양 들어가 끝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잠시 뒤 행사가 시작되었다. 동경에 가 있는 조선 유학생들이 조직한 ‘아동문제연구회’인 ‘색동회’가 주관한 ‘동요회’였다. 단상 가까이 있는 석중은 먼발치에 알아보았고 그 옆에 선 분은 방정환 선생 같았다. 『어린이』에서 만난 글이나 개인 편지로 상상한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동요를 통해 조선의 어린이가 자긍심과 희망을 품도록 하자는 취지로 노래 발표가 이어졌다. 노래가 끝나면 사회자인 방정환 선생이 시인 이야기를 했다. ‘고향의 봄’ 노래에 이어 이원수를 소개하고 ‘고드름’ 노래 다음에 윤석중을 소개하는 형태였다.
“다음 노래는 서덕출 시, 윤극영 곡 봄편지로 김영복 양이 독창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바짝 긴장하여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연못 가에 새로 핀
버들 잎을 따서요
우표 한 장 붙여서
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대한 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 옵니다
연주자가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나는 어쩐지 부끄럽고 민망하여 가슴만 졸이고 있었는데 이백여 명이 일제히 손뼉을 쳤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강당 천장을 뚫을 듯했다.
김영복 양이 무대로 내려가고 작자 소개를 할 차례였다. 사회자인 방정환 선생이 헛기침하자 장내는 신호를 기다리는 병사들처럼 주목했다.
“이 애상적인 동요를 지은 서덕출 시인은 경남 울산부 복산동에 사는 사람으로 두 다리를 못 쓰는 불구자입니다. 세상에 난 후 마당에도 제 발로 나오지를 못하고 항상 방 속에서만 쓸쓸히 사는 가련한 소년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따뜻한 마음으로 자연과 이웃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개인의 아픔과 시대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는 장한 소년입니다. 얼마 전 서덕출 시인이 제게 보내온 편지를 소개하겠습니다. 흠흠, 방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서울의 봄빛은 어떠하십니까? 이곳 울산의 봄빛은……”
편지 시작부터 부인석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나더니 편지가 끝나갈 무렵엔 점점 더 울음소리가 커졌다. 잠시 틈을 둔 방정환 선생이 다음 동요를 넘어가려는데 남자 한 분이 나왔다.
“그렇듯 좋은 동요를 지어낸 귀한 시인이 그렇듯 불행한 생활을 하고 있다니 그냥 돌아가서는 도저히 잠이 오지 않겠습니다. 시인의 쓸쓸한 마음을 위안하고 좋은 동요를 낳아 준 것에 감사하는 한편 앞날을 축복하는 간절한 정을 선물로 보내십시다.”
남자 어른의 말에 모든 사람이 찬성하였고 발 빠른 사람 몇이 모자나 보자기를 들고 한 바퀴 돌았다. 잠깐만에 걷힌 돈은 무려 3원 21전이나 되었는데, 선물 선정과 전달은 색동회에 맡긴다는 발표와 함께 방정환 선생에게 넘겨졌다.
그 순간 내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지고 빙글빙글 돌았다. 바늘방석 같던 의자에서 벗어난 내 몸이 둥싯거리더니 저만치, 저 멀리 달아났고 잠시 뒤 우리 집 대문으로 쑥 들어섰다. 무슨 축지법을 쓰는 것도 아닌데 어쨌든 그랬다. 마당의 초목도 모두 비에 젖어 있었다.
오동나무 아래 짚방석에 앉아 있는데 열려 있는 대문으로 석중이 쑥 들어섰다. 바로 뒤따르는 방정환 선생의 얼굴을 보고 나는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내 몸은 바꿔 있었다. 다리에 힘이 실리지 않고 등이 굽었다. 나무 둥치를 붙들고 용을 써봤지만 일어설 수 없었다. 다리가 펴지지 않았다. 나들이옷 입은 남자들과 부인들, 교복 입은 학생들, 어린아이들이 태화강 둑을 넘는 물처럼 밀려왔다. 족히 이백 명은 될 것 같았다. 맨 앞에 선 방정환 선생이 선물 꾸러미를 주며 풀어보라 했다. 처음엔 미적거렸으나 모인 사람들이 함께 채근하는 바람에 나는 조심스럽게 포장을 풀었다. 만년필이었다. 마츠시게 잡화점에서 보았던 만년필, 단박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두고두고 생각났던 그 만년필이었다.
“결코 낙망하여서는 안 됩니다. 슬퍼만 하여서는 안 됩니다.”
“이 만년필로 봄편지같이 좋은 노래를 자꾸 지어주세요.”
“아무쪼록 웃어 주십시오. 웃으면서 살아 주십시오. 웃음 속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이 만년필로 적어 주십시오.”
너나없이 나서서 몸을 낮추거나 내 손을 잡으며 한마디씩 했다.
모양 빠지게 한줄기 눈물을 흘리고 나서야 나는 입을 열었다.
“아, 아, 이 귀한 만년필을……”
“덕출 씨, 덕출 씨.”
나를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석중이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
“어디긴요, 덕출 씨 방이지요. 잠꼬대하시길래…… 아, 이거 좋은 꿈을 제가 훼방 놓았습니까? 하늘이 놀라운 시구를 주셨나요? 아니면 아리따운 여성이라도 만났어요?”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꿈, 꿈이었구나. 그래도 좋았다. 걸어봤고, 고운 노래를 들었고, 만년필을 받았으니 기쁘고 행복했다. 꼭 그만큼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간밤엔 놀라셨지요? 미안했습니다.”
“아이구, 무슨 말씀을요. 나들이가 과했나 싶어 반성했습니다.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잠은 깊게 주무시는 듯했습니다.”
“예. 잠포록하게 잘 잤습니다. 예쁜 꿈도 꾸었고요. ……비가 오래도록 내리는가 봅니다.”
그 대답은 고송이 했다. 우리 말소리에 그도 잠을 깬 모양이었다.
“간밤부터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여름 한가운데인데 장맛비같이 말이에요.”
고송이 누운 채로 방문을 열었다. 그 틈으로 잎사귀를 접은 채로 아래로 처진 자귀나무가 보이고 빗소리가 크게 들렸다. 우리는 앉거나 누운 채로 다문다문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구에서 새벽차를 탔다는 윤복진이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복진은 점점 더 심해지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걸어들어왔다. 어제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여비를 마련한다고 이제야 올 수 있었다고 했다. 함께 대구사범을 다니고 있는 고송이 누구보다도 그 어려움에 공감했고 석중은 처음 뵙는다며 환하게 웃었다. 나와 동갑인 복진은 석중에게 깍듯했고 편지 읽는 기쁨이 컸다며 나에게도 특별한 인사를 건넸다. 우리 <굴렁쇠> 회보 만드는 방식이 그랬다. 각자 지은 동요와 글동무에게 알릴 일을 적어 우편으로 전하는데 서울의 석중이 한 꼭지를 채워 진주의 소용수에게 보내면 그가 자기 작품과 편지를 보태 마산의 이원수에게, 이원수는 언양의 신고송에게 보내는 식이다. 나는 고송에게 받은 원고에다 내 글을 보태 대구로 보낸다. 그렇게 전국을 돌며 쌓인 작품들은 다시 서울의 석중에게 가니, 나이는 어려도 석중이 굴렁쇠의 중심이었다.
“어째 이원수 씨가 보이지 않는군요.”
복진의 말에 석중이 안타까움을 실어 말했다.
“제가 마산에서 만나 하룻밤을 보내고 울산으로 가자고 했지요. 함께 있는 동안에도 통 말이 없더니 작은 목소리로 못 간다고 하는 거예요. 기차 삯이 없거니와 학생 독서회 사건으로 숨어 지낸다니 더 권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쿠, 고생이 많으시군요. 그래도 곳곳에서 그렇게 애쓰시는 분들, 우리 조선의 저력 아니겠습니까.”
복진의 말을 시작으로 전국대회에 참가한 지역 대표처럼 서울, 대구, 언양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운동을 전했다. 갈수록 목소리가 낮아지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바깥 사정을 잘 모르는 나는 민우회 활동과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