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비 오는 밤.
연잎에 빗방울이 구르고 비바람에 흔들리는 오동나무 가지와 손바닥 같은 잎사귀, 빗소리에 묻히지 않고 나 여기 있소 울어대는 귀뚜라미, 비 무게에 고개를 꺾은 배롱나무, 꼿꼿이 선 채로 비를 감당하는 백일홍…… 그립디그리웠던 동무들이 거미줄 토해내듯 쏟아낸 이야기들도 어느새 잦아졌다. 나는 말없이 마당만 바라보고 있는 벗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았다. 내일이면 흩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흐르는 시간을 저 오동나무 기둥에 친친 감아놓고 싶었다. 벗들도 아쉬웠던 것일까, 고송이 혼자 손뼉을 두 번 치더니 말했다.
“아,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전국에서 힘들게 모였는데, 기념 시 한 수 어떻습니까?”
뜬금없었으나 태화강 윤슬같이 멋진 말이었다. 너나없이 같은 생각이었는지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누가 하냐, 함께 쓰자, 그러면 돌아가며 한 줄씩 만드냐,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그 사이 몸 빠른 석중이 방으로 들어가 붓과 종이를 챙겼다. 고송이 부축 대신 손을 방 쪽으로 내밀었다. 신호를 알아들은 나는 엉덩이를 밀고 들고 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벗들은 섣부른 친절보다 기다려주는 게 나를 돕는 일이라는 걸 터득한 것이다.
방바닥에 깔린 밥상만 한 한지 주위로 둘러앉았다. 작게 흔들리는 호롱불 따라 우리들의 그림자가 벽에 일렁거렸다. 비 오는 밤 아무도 모르는 외진 곳에서 뭔가 비밀스러운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니 숙연한 느낌이 들었다.
정적을 깨고 복진이 입을 열었다. 눈썹이 짙고 콧날이 오뚝한 데다가 머리칼을 쓱 올리는 모습이 도시 신사 같았다.
“오동나무 비바람에 잎 뜨는 밤……”
한 줄 글에 이 밤의 분위기가 제대로 잡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석중이 받아 적으며 말했다.
“오, 좋습니다. 동요로 불릴 걸 생각해서 계속 3음보로 맞추면 되겠습니다.”
어떤 시구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시작하여 핏줄을 타고 올라왔다. 입안에서 맴돌던 그 시구를 나는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우던, 네 동무가, 모여습니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했다. 석중이 재빨리 붓을 놀렸다. 이제 멈추고 나아감이 반복됐다. 각자 마음속으로 공글리다가 한 마디 읊조리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성에 차지 않을 때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모두의 찬성을 받은 시구는 석중의 손끝에서 종이로 옮겨졌다. 한 행, 한 행이 쌓여갔다.
드디어 시가 완성되었다. 그때 시계 괘종이 한 번 쳤다. 벌써 새벽 한 시가 된 것이다. 석중이 읽는 시를 나는 눈을 감고 들었다. 시어가 서로를 단단히 묶여 어느 한 글자도 뺄 게 없었다.
오동나무 비바람에 잎 뜨는 이 밤
그리웁던 네 동무가 모여습니다
이 비가 끗치고 날이 밝으면
네 동무도 흩어저 떠나갑니다
오늘 밤엔 귀뜨람이 우는 노래도
마디 마디 비에 젖어 눈물납니다
문풍지 비바람 스치는 이밤
그리우든 네 동무가 모여습니다
제목도 단번에 정해졌다. 고송이 ‘슲흔 밤’이 어떠냐고 제안하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네 동무’나 ‘오늘 밤’보다도 훨씬 좋았다. 복진의 동의까지 얻은 석중이 조금 큰 글씨로 제목을 적었다. 고송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한 번 읽자 복진이 느리고 나지막하게 다시 읊었다. 석중이 높고 맑은 목소리로 읽고 난 뒤 어눌하나마 나도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암송했다. 이미 외워버렸으니 가능했다.
우리는 ‘슲흔 밤’이 동요로 불릴 상상도 했다.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은데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마음으로 박태준 선생이 좋겠다, 윤극영 선생께 부탁하자, 일단 방정환 선생께 보내자 부산을 떨었다. 즐겁고 행복한 상상이었다.
이제 밤비는 그치고 시간은 새벽으로 달려가고 있다. 자리에 눕긴 했지만 잠을 이룰 수는 없었다. 내년에 다시 모이자고 약속하긴 했지만 삼백예순 날 뒤를 어떻게 기약한단 말인가.
제 직분에 충실한 귀뚜라미는 여전히 쟁쟁거렸고 나란히 누운 벗들의 숨소리도 화음을 이루듯 끼어들었다. 나는 누운 채 열린 방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마당이 뿌연히 밝아 연당과 오동나무 형체가 조금씩 보였다. 소리와 빛으로 새벽이 오는 중이었다. 슬프지만 아름답고, 밤새워 일하는 누군가에게는 위안일 달이 곧 모습을 드러내리라. 그 신월은 눈물 어린 눈으로, 다정한 마음으로 세상을 내려보겠지.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