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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섬의 섬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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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미 Oct 21. 2024

슬픈 밤, 새벽달 3

   저녁은 평상에서 먹었다. 어제는 빙빙 돌며 낯가림하던 동생들이 두레상에 함께 앉았다. 나와 열 살 이상 터울 지는 동생들은 석중을 더 따랐다. 경성 이야기를 실감 나게 하기도 했지만 이거 뭐냐, 저건 어떻게 쓰냐는 질문으로 동생들이 지지배배 이야기하게 했다. 말린 쑥으로 모깃불도 함께 피웠다. 수박과 참외를 먹고 육 척 장군 같은 고송은 두 어깨를 우쭐거리며 동생들을 데리고 바지랑대 춤을 추었다. 석중은 어디서 찾았는지 저만치서 내 비밀 잡기장을 읽고 있었다. 얼른 뺏어오라는 내 말에 동생들이 달려들고 석중은 다른 쪽으로 뛰고 동생들은 우르르 뒤쫓았다. 그 바람에 마룻장 하나가 내려앉고 숟가락 통이 엎어졌다. 지켜보던 어머니도 누이도 소리 내어 웃었다. 

  정인섭을 배웅하고 난 뒤 석중은 동생들을 앞세워 밤마실을 나갔다. 고송은 평상에 누워 별바라기를 하는가 싶더니 낮게 코를 골았다. 그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8월 한낮, 힘든 기색 없이 나를 업고 다녔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시큰거리는 마음으로 고송의 얼굴을 내려다보는데 문득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 다행이다, 모깃불 연기가 있어서

  내게 찾아와준 시구를 놓치고 싶지 않아 나는 얼른 들어가자고 재촉했다. 이런 순간이 익숙한 일인 듯 칠복은 나를 방에 내린 다음 종이와 붓을 펼쳐 주었다. 

  다음 구절을 머릿속에 공글리는 중에 통증이 찾아들었다. 다리에 둥근 인두가 닿은 듯, 전류가 흐르는 듯 뜨겁고 찌릿했다. 발가락 끝마디까지 뻣뻣하게 굳어 꼼짝할 수 없었다. 대번에 식은땀이 나고 굽은 척추 곳곳이 송곳에 찔리는 것 같았다. 좁은 방이 캄캄한 황무지가 되고 방문 옆 호각은 십 리 밖에 있었다. 통증보다 차라리 죽음이 나았다. 죽어야지 하고 혀를 깨물었다.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고 윗니 아랫니 사이가 벌어지며 속엣것들이 역류했다. 한쪽 얼굴을 댄 방바닥에 밥알이며 냉면 가닥이 뒤섞여 나와서는 다시 얼굴에 닿았다. 시큼한 냄새를 동반한 뜨뜻미지근한 토사물이었다. 나는 용을 써서 머리를 들었다. 죽겠다 하면서도 기도가 막힐까 걱정하는 꼬락서니하고는…… 어디에서 날아들었는지 꼽등이가 토사물 위에 앉았다. 꼭 나를 닮았다. 눈물이 흘렀다. 

  꼽등이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까무룩 멀어지는 정신에도 마당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용케 들렸다. 석중과 동생들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석중에게 가닿기를 소망하며 마음으로 말했다. 제발 들어오지 마시오, 그길로 경성으로 가 버리시오, 이 방에 오지 말고 고송처럼 평상에서 잠자시오, 그도 아니라면 밤새도록 오동잎 흔드는 바람 소리를 듣든지 하고많은 별을 헤아리시오……

  하지만 곧 툇마루가 삐걱거리고 낮은 음성이 일렁거렸다. 긴 원통을 울리는 소리, 담장에 부딪혀 돌아오는 메아리 같았는데 나는 내 이름만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토사물을 덮으려고 시구 적은 종이를 잡으려 했으나 그마저도 팔이 닿지 않았다. 방문이 열리고 놀라는 소리, 나를 흔들며 내지르는 소리, 사람을 부르는 소리…… 나는 점점 정신을 잃어갔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대로 동생의 세계로 떠나버렸으면 좋겠다.
   “신월아, 이제 정신이 드니? 아이고, 부처님. 감사합니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늘 나를 신월로 불렀다. 나도 제일 좋아하는 이름이다. 
   “아픈 건 어떠냐? 옷 갈아입자.”

  그사이 나는 요 위에 눕혀져 있었고 방바닥은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정말 아팠던 것인지 한바탕 악몽을 꾼 건지 헷갈렸다. 
   “벗, 벗들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어. ……못 거들게 했다. 밖에 나가 있으라 했어. ”
   늘 내 마음 짚어주는, 알아서 갈무리해주는 어머니다. 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끼니며 잠자리며, 여름 손님 치른다고 힘드시지요?”

  “무슨 소리, 마음은 극진한데 대접이 변변찮아 미안할 뿐이다. 올해 우리 형편이 예전 같지 않아서……”

  어머니 가슴에 평생 대못 박고 있는 나는 윗몸을 일으켜 어머니 손을 잡았다. 계봉이 죽을 때도, 아버지가 우리 보는 앞에서 수갑 채워져 부산까지 압송당할 때도 의연했던 분이다. 아버지는 학성을 일본성으로 복원하기 위한 모금 운동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그 돈으로 조선인 중학교를 세우려 했던 민우회 주동자였다. 집안에서 인맥을 대고 재산을 헐어 풀려나긴 했으나 매일 가택수색을 당해야 했다. 집안의 장남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불안해하는 동생들에게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다독이는 일뿐이었다. 야키이 순사는 내가 발표한 동시와 소년시를 흔들며 내선 정책에 어긋나지 않는지 어깃장을 놓기도 했지만 나는 울분을 삼켜야 했다. 분노의 눈길과 떨리는 손은 뜨개질로 숨긴 채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시구를 공글렸다. 

  “신월아, 나는 말이다, 저 벗들이 떠나고 나면 네가 더 힘들어할까 봐 걱정이다. 내가 수예도 뜨개질도 가르쳐주긴 했으나 네가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거 싫다.”

  내 아픈 곳을 정확히 찌르다니, 역시 어머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여태 편지만으로도 잘 만났는걸요. 이 만남은 덤으로, 선물로 여길 겁니다. ……잠자리를 이렇게 나란히 봐주셨네요. 이제 들어오라고 하세요. 아까운 시간, 나눌 이야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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