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은 남녀 사이에만 통하는 게 아니었다. 나와 석중, 고송은 만나자마자 몇 년 세월을 건너뛰었다. 『어린이』로 교류했던 발표작, 함께 읽었던 책, 나누었던 편지가 있었기에 급속히 친해졌으며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뜨거워졌다. 방정환 선생을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는 점도 같았다. 나와 고송은 동갑이고 석중은 한참 어렸지만 우리는 서로 존대했다. 석중의 진중함이 나이를 잊게 하기도 했거니와 야, 너, 형님, 동생 하면서 층하를 두는 게 싫었다.
태화강으로 나갈까 하다가 본정통 구경으로 의견이 모였다. 자연보다는 문명이 좋은 나이였다. 주전부리를 꾸려준 어머니가 손님 접대하라며 냉면값을 챙겨주었다. 그런데 고송이 한사코 나를 업겠다고 했다. 혈기 왕성하고 기골 장대하다고 자랑하고픈 건가, 나는 부끄럽고 민망했다. 짜증스럽기도 했다. 가만히만 있어도 더운 날씨인데 뜨거운 짐짝을 등에 업고 어떻게 걷는단 말인가. 하지만 석중까지 거들자 난처한 낯빛으로 안절부절못하던 칠복이 물러나 버렸다. 손님에게 화낼 수는 없는 법, 나는 할 수 없이 고송의 등에 내 가슴팍을 댔다. 어제 저녁밥을 양껏 먹고 간밤에 내온 참외까지 달게 먹었던 걸 후회하며 나는 숨을 참았다. 잠시 휘청거리던 고송이 바로 섰고 내 엉덩이를 잡고 있던 석중이 자기 손을 뗐다.
우리 집이 속해 있는 복산동에도 십여 년 전부터 일본 가옥이 생겨나긴 했으나 중심지는 여전히 북정과 성남이었다. 우리는 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걸었다. 고송은 업고 나는 업히고 석중은 팔을 뻗어 내 머리 위로 양산을 펼쳤다. 기이한 행렬이었으니 흘끔거리는 사람도 많았다. 병신 새끼 주제에 집에 처박혀 있지, 라는 말도 들렸다.
울산공립보통학교 앞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몇 년 전에 서양식 2층 교사를 지어 올린 울산 최초의 6년제 보통학교, 내가 가고 싶었으나 갈 수 없었던 학교였다. 우리는 팽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고송의 등짝에서 땀이 흘러 땅으로 떨어졌다.
“공연히 나오자고 했습니다. 이런 몸을 해서……”
“무슨 말씀을요. 언양 촌놈이 울산 읍내 구경하니 좋기만 합니다.”
“죄송합니다.”
내 말에 고송과 석중이 한꺼번에 손을 내저었다. 입을 모아 그런 말씀 말라고 했다. 한 줄기 바람이 불고 고송이 땀을 닦으며 말했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덕출 씨 노래를 부르며 조선의 봄을 기다리고 있는걸요. 덕출 씨는 슬픈 운명에 좌절하고 있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에요. 오래오래 시를 써주셔야 해요. 언제였던가요? 덕출 씨가 쓴 ‘안병소 씨께’라는 글 발표하셨던 거요?”
『어린이』는 내 침침한 방을 비춘 한 줄기 빛이었다. 배운 데 없는 내게 유일한 가르침을 준 잡지다. 나는 그 빛을 읽었고 흉내 내다가 내 이름자 박힌 시와 산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내가 기억을 더듬는 동안을 참지 못하고 석중과 고송이 말을 주고받았다.
“『어린이』 작년 11월호였어요.”
“장애를 극복하고 감동적인 선율을 연주한 안병소 씨도 대단하지만 저는 덕출 형 발언이 더 감동이었어요. 불구 소년이라고 스스로 밝히셨잖아요.”
“그랬어요. 나는 우리 모두 불구라는 얘기로 들렸어요. 나라가 불구이니 말이에요. 덕출 씨가 시로 썼듯 우리 조선에도 봄이 오겠지요. 나는 믿습니다.”
고송은 언양소년단 결성을 이끌고 언양조기회 활동에 부지런한 소년운동의 기수였다. 그의 부지런함과 열정을 높이 사 방정환 선생이 언양을 방문할 정도였다. 2년 전에 대구사범학교로 진학했고 지금은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에 매진하는 중이다. 바쁜 와중에도 작품 발표는 나보다 한 해 빨랐고 지금은 기쁨사 동인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다.
“자, 이제 가볼까요? 울산청년회관도 가깝지요? 그런 장소가 만들어지고 돈을 기탁하고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들, 다들 존경스럽습니다. 지금에야 신사나 심상소학교 다니는 일본인들 기세가 등등하지만 조선 봄을 그리워하는 제비들이 곳곳에 있으니 우리 좋은 세상도 머지않을 겁니다. 그때까지 봄편지도 부르고 고향의 봄도 목 터져라 불러야겠어요.”
우리는 울산청년회관은 물론 야학과 청년회 활동을 주도하는 해남사까지 둘러본 다음 본정통 남쪽 마츠시게 잡화점까지 들렀다. 주인이 일본인이긴 하나 책이나 학용품을 가장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곳이다. 고송과 석중이 도자기와 화장품, 술과 담배를 기웃기웃하는 틈을 타서 나는 종이와 붓을 샀다. 불구 소년을 찾아와 참마음을 보여주는 그들에게 줄 선물이었다. 글과 영혼을 나누는 벗들과 함께한 내 최초의 나들이를 기념하고 싶기도 했다.
냉면 가게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는 고송이 노래를 시작했다. 창 같기도 하고 동요 같기도 했는데 정해진 박자와 음정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가사가 작년에 내가 썼던 거였다. 저걸 외우고 있다니, 가슴이 후끈하고 어깨가 으쓱거렸다.
“휘근~휘근 여름날 더어~오며는~~ 듬벅~듬벅 둑겁이 논에서~ 울며~~”
고송의 노래를 석중이 받았는데 역시 제멋대로였다. 그래도 맑고 높은 목소리라 듣기에는 더 좋았다.
“매압매압 매~~압이 숩~에서 울며~ 버꾹버꾹 버~~꾹새 산~에서 우네~”
흉내말을 잘 부려 썼다는 칭찬을 받으며 나도 마음으로 함께 불렀다. 그런데 우리만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었다. 집이 멀지 않았는데 저만치서 양복쟁이가 큰소리로 동요를 부르고 있었다. 놀랍게도 윤극영 선생이 곡을 입힌 ‘봄편지’였다. 나의 등단작 혹은 출세작.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어, 맞나? 물 건너에 있어야 하는데……
혼잣말하던 고송이 큰 소리로 양복쟁이를 불렀다.
“인섭이 형! 정인섭 형 맞죠?”
나를 업은 고송이 엉거주춤하는 걸 보고 양복쟁이가 뛰어왔다.
정인섭이라면 『어린이』에서 봤던 이름이다. 색동회 발기인에다가 시와 동화 여러 편을 발표했다는 걸 알고 있다.
고송은 길에 선 채로 양편을 소개했다.
“모두 이름들은 알고 계실 거고요. 이 형님 집에서 가난한 우리 모자가 아래채 빌려 의탁하고 있어요. 소년운동 하시다가 지금은 와세다대학에 유학 중이고요. 그나저나 여긴 무슨 일이래요?”
고송이 석중과 정인섭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방학이라 집에 왔는데 자네가 글벗들 모인다고 서덕출 씨 집에 갔다는 거야. 그래서 나도 달려왔지. 이 동네라는 건 들었지만 정작 와 보니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봄편지를 불렀어. 혹시라도 누가 나타나 서덕출 씨 집을 가르쳐줄지 모르겠다 싶어서.”
“하하, 형님답소.”
“이럴 게 아니라 집으로 들어가시지요. 보시다시피 고송 씨가 지금 고역입니다.”
나의 말에 모두 그렇다면서 멀리 보이는 능소화 담장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걸어가면서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는데 정인섭은 유학생답게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조선 소년들이 읽고 조선의 설화도 외국에 퍼뜨려야 한다고 했다.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해외문학연구회도 조직했다고 했다. 가난한 고송이 보통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금융조합 급사로 일하다가 겨우겨우 사범학교로 진학하는 동안 정인섭은 좋은 두뇌와 유복한 가정, 마음먹은 대로 실행할 수 있는 건강한 신체로 와세다대 물을 먹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음속에서 부러움과 자괴감이 쌍으로 몰려왔다. 틈만 나면 튀어 오르는 못난, 그러나 내칠 수 없는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