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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예 Mar 22. 2023

튤립에게

산책하는 진저캣

큰 아이의 코로나 확진에 이어 둘째도 코로나에 걸렸다. 두 아이의 방문 앞에 삼시 세 끼를 대령하며 나도 끙끙 몸살을 앓았다. 책방에서 하는 아이들 독서 수업은 미뤘지만 내 그림책 작업은 계속 진행하느라 집과 작업실을 오가며 고단하고 지친 시간을 보냈다.

사실 입시 끝나면 더 이상 아이들에게 시달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야 연년생의 입시를 끝내고 내 일에만 집중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그래, 엄마의 역할에 끝이 어디 있는가.

사는 게 원래 고단한 법이지...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숙이며 걷다가 꽝꽝 굳어있는 마당을 보았다.

아차차, 그동안 허둥지둥 집을 나서느라 물을 줄 여유조차 없었구나. 미안해.

작년 늦가을 찬바람 속에서 옆집 호두마루 엄마와 함께 구근을 심었을 때, 너무 추운 것 아닐까, 다음 해에 꽃을 볼 수 있을까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한두 번 물을 주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붉은 입술 같은 싹이 뾰족뾰족 올라오고 있었다. 아직은 시린 바람 속에서 굳은 땅을 뚫고 용감하게 얼굴을 내민 모습을 보니 코끝이 찡했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서 빨간 튤립 싹을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가방을 던져놓고 세탁실 옷걸이에 대충 옷을 건 뒤, 소파 위에 털썩 앉아서 곰곰이 튤립을 생각했다.  


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가끔 내가 무심해지면 우리 집 고양이는 야옹거리며 시위를 하지만 마당의 튤립은 소리를 내도 내가 듣질 못하잖아.

게다가 올 겨울엔 유난히 추웠지. 저 연약한 잎으로 혹독한 겨울을 버티다, 제대로 물을 주지 못해 딱딱해진 땅을 기어이 뚫고 나왔구나.

나도 이 피로하고 지친 인생을 기운 내서 살아야겠지.


그래,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잖아. 맨날 힘든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실망스러운 것도 아니야. 끙끙 앓다가도 개구리처럼 폴짝 뛰어오르기도 하잖아. 신문 기사와 뉴스는 한숨 나게 하지만 가끔 신나는 영화와 설레는 책도 만나지. 통장을 보면 미래가 불안했다가 전시회에서 근사한 작품을 만나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충만함을 느끼기도 해.

무엇보다 내 작업에 있어서 - 매일 절망하기만 하는 건 아니야. 어떤 날엔 완벽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어. 아직 나는 겨울을 지나고 있을 뿐이야.      

  


튤립에게


내 안에는

너와 같은 구근이 있지.

서늘한 가을에 흙이불을 덮고

콜록콜록 추위를 삼키고 뱉으며

흘린 눈물로 자신을 닦다가

참새들의 수다가 요란한 아침,

산책하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땅을 흔드는 어느 날,  

햇빛보다 강하게,

발레리나처럼 우아하게

꽃잎을 뽐내는 너.

내 안에는

아직 겨울을 삼키고 있는   

너와 같은 구근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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