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예일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소예 May 11. 2023

목요일 오후 세시 삼십 분

산책하는 진저캣

목요일 오후 3시 30분.

책방에서 보태니컬 아트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동네를 잠깐 걸었다.

카레 오랜, 썸띵 인 더 커피, 읍천리 등 예쁜 카페들을 따라 걷다가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에메랄드 길처럼 쭉 뻗어진 숲의 입구를 만났다.

경사가 심하지 않고 주변 나무들과 땅이 잘 정돈되어 있어서 "이리로 와~이리로 와 ~" 하며 숲이 자연스럽게 나를 이끄는 것 같았다.

보슬보슬 안개비가 내렸는데 우산을 접고 걸으니 운치 있고 시원했다. 특히 땅바닥에 멍석 같은 게 깔려 있어서 폭신폭신해 걷기 좋았다. 누가 이런 기특한 생각을 했을까?

그동안 김포시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를 늘려주지 않는다고 툴툴댔지만 이렇게 잘 닦여진 둘레길을 걸으니 누구의 생각이고, 누구의 실행력인지 칭찬해주고 싶었다.   

중간중간 빨간 화살표로 만든 이정표가 마음에 들었다. 길을 잃을까 불안하지 않아서 좋고,  한 시간 안에 산책을 마치고 가야 하는 나 같은 사람은 짧은 코스를 계획할 수 있어서 좋았다.   

오르락내리락 바닥의 높이가 달라지는 둘레길을 걸으니 즐거웠다.  

눈 아래로 빨갛게 핀 꽃과 저 높이 새둥지를 올린 기다란 나무, 목청을 뽐내는 새와 재빠르게 나무를 타는 청설모, 날렵한 몸매로 순식간에 지나가는 고양이, 다리를 떨며 건넌 다리 등...

산책이 주는 다양한 경험과 시점의 변화가 나를 활기차게 만들었다.

 나는 가끔씩 어떤 외로움과 갈망을 느끼는데 이런 가벼운 산책을 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진상을 떠는 사람을 만나 분이 날 때,

삶의 방향을 못 찾아 막막할 때,

슬픔에 서서히 물들어갈 때에도

무작정 걸으면 저 밑에 깔려있던 긍정의 기운이 고개를 들고 일어서는 걸 느끼게 된다.    

40분 정도 걸으니 모담폭포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왔다. 나는 등 뒤의 숲 속으로 나를 비틀던 생각들이 던져졌다는.걸 깨달았다. 그러자 마음 저 아래에 깔려있던 행복한 기억이 둥실 떠올라 웃음이 났다.


'나에게 맞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벼락 맞을 확률 같은 거겠지.

그래도 첫사랑은 완벽했어.

인생에서 나와 그렇게 꼭 맞는 사람을 한 번쯤은 만났던 거지.   

호선이는 참 낭만적이고 근사했어.

그 애가 보여준 밤의 캠퍼스와 즐거운 이야기들은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처럼 다정했어.

동섭이는 나를 참 아끼고 응원해 주었는데 그 마음을 몰라줬던 게 미안하네.

지금은 누군가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겠지.

인섭오빠는 잊지 못할 은인이었어.

그렇게 조건 없이 베풀어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건 내 삶의 귀한 복인 거야.  

내 주변에는 내 영혼을 파괴하는 끔찍한 사람들이 존재했고,

나는 사랑에 대한 희망을 움켜쥐고 있지 않지만

미소를 지으며 떠올릴 수 있는 누군가가 있네.  

이만하면 근사하게 살아온 거고,  

걸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지금의 삶도 꽤 괜찮은 것 같아.'

모담산에서 11km 거리의 풍무동까지 닿아있는 길처럼 내 생각은 과거와 현재를 지났다.

답답하고 짜증스러웠던 몇몇 사건들이 툭툭 떨어져 나가며 마음의 체중이 줄고 발걸음이 가벼웠다.


다음 목요일엔 또 다른 코스로 걸어봐야겠다.

그럼 숲은 나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받아 증발시켜 주고,

저 아래에 깔린 행복한 기억들을 꺼내 오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튤립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