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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예 Jun 01. 2023

자연의 대답

산책하는 진저캣

수요일 오후 여섯시 반,

저녁을 먹고 책방 주변을 걸었다.



초록과 노랑이 이끄는 야트막한 동산 길


스쳐가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 같은 중년의 여성들이었다.

가벼운 등산복이나 트레이닝복을 입은 그들과 달리

나는 샤랄라 치마에 분홍색 짧은 재킷을 입고 있어서 조금 민망했다.

뭐 이 산책은 오늘의 계획에 없었으니까.


이렇게 혼자 동산을 걷는 일은 행복하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막장 드라마보다, 술자리의 무의미한 대화보다, 아줌마들의 밑도 끝도 없는 남 얘기보다, 따분한 만남보다 좋다.

느릿느릿 동산을 걷다 보면

머릿속을 떠다니는 글자들이 질서를 잡고 재배치되면서 글이 되고 그림이 된다


나는 종종 말없이 사람들을 관찰하길 즐긴다. 그건 책방에 새 책이 들어와서 표지를 접할 때 느끼는 호기심과 비슷하다. 어떤 사람은 제목만 그럴싸할 뿐 뻔하고 시시한 내용의 책과 같고 어떤 사람은 읽고 싶지만 읽지 못하는 원서와도 같다. 사실 사람을 관찰하다 보면 금세 흥미로울 것도, 궁금할 것도 없어지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한다.

동산을 오르내리는 짧은 산책을 하다 보면 ‘그래, 내가 원했던 게 이거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무의 모양과 길이, 초록 잎의 형태를 보며 싫증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바람 따라 흔들리며 스스스 사사삭 소리를 내는 잎들과 높낮이가 다른 새들의 소리,

그날의 온도와 습도의 영향을 받아 달라지는 흙과 구름의 모양, 숲의 냄새..

자연은 사람과 달리 지루할 틈이 업고 끝도 없이 계속되는 이야기 같다.




나는 대부분의 만남에서 내 얘기를 하기보다는 주로 듣는 위치에 있을 때가 많다.

나이가 적든 많든 사람들은 내 앞에만 오면 고해성사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나의 리액션에 감탄한다. 나는 매번 사람들의 이야기에 몰입하고 정성껏 귀 기울여 듣는다. 그러다 보면 의도치 않게 당사자의 숨겨진 내면까지 빤히 들여다볼 때도 있다. 그건 참 씁쓸한 일이다.

어쨌거나 사람들은 나를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생각하겠지만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남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기에 내 생각과 감정은 지나치게 풍부해. 나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해.'

내 안에 이야기가 쌓일 때면 산책을 하게 된다.

꿀꺽 삼켜진 말과 눈물, 한숨을 나무와 흙과 새들에게 두서없이 말하며 걷다 보면

간결하게 정리된 문장들이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나는 그걸 자연의 대답이라고 부른다.


짧은 산책이 끝나는 길에 빗자루가 보였다.

알록달록 촌스러운 빗자루가 의자 옆에 놓인 뜻밖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누가 비질을 했을까?

누가 한쪽으로 낙엽을 모아 길을 곱게 정리했을까?

누구의 고운 마음일까?'

나의 골똘한 질문에 자연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분명 너처럼 나이가 있거나 너보다 나이가 든 사람일 거야.

누구에게 보답을 바라지 않으면서

몸에 밴 성실함과 친절함으로 주변을 살피는 일은

나이 든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일이지.

너도 그렇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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